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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데스크 칼럼] 디지털 소음 속, 본질을 읽는 시간 '독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공유하는 행위는 AI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푸른 독서회'의 테이블 위에는 늘 책과 함께 사람의 온기가 놓인다. 2008년 작은 씨앗으로 시작해 17년의...

[데스크 칼럼] 디지털 소음 속, 본질을 읽는 시간 '독서'

스마트폰의 짧은 화면 속에서 수조 개의 데이터가 명멸하는 시대, 손 안의 세상은 넓으나 마음 둘 곳은 좁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훑을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은 더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간다. 화려한 알고리즘이 우리를 지배하는 ‘빛의 속도’를 거스르며, 17년째 묵직한 종이책의 무게를 견디고 서로의 숨결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가 2010년부터 몸담아온 지역의 독서 공동체 ‘푸른 독서회’ 이야기다.

필자와 이 모임의 첫 만남은 조금 특별했다. 2010년 당시, 지역의 이색적인 모임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을 찾았던 기자의 눈에 비친 독서회. 이름도 갖추지 못한‘독서회’는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2008년 남성들로 구성된 모임은 책 내용을 요약해 발표하는 딱딱한 자리가 아니었다.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타인의 상처를 보듬으며, 끝내 ‘우리 모임이 최고’라며 환하게 웃는 회원들의 열정에 매료되고 말았다. 취재 수첩을 덮는 순간, 필자는 이미 기자가 아닌 한 명의 회원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어느덧 17년째를 향해가고 있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모임은 '푸른 독서회'로 명명했다. 이렇게 오래이 이어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따로 읽기’와 ‘경청의 미학’에 있다. 우리 모임은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해 읽는 방식을 고수한다. 내가 읽은 책은 한 권뿐이지만, 모임에 나와 회원들의 소감을 경청하고 나면 그날 모인 인원수만큼, 즉 6~7권의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가득 채워 돌아가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독서 이력을 공유하며 앉은 자리에서 수천 페이지의 세계를 횡단하는 셈이다.

특히 김 모 회장의 독서 이력은 모임의 자랑이자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10권을 완독한 데 이어, 이번 겨울에는 홍명희의 『임꺽정』 10권 등 호흡이 긴 대하소설들을 묵묵히 독파해왔다. 인스턴트식 정보가 판치는 세상에서, 수만 리의 문장을 발로 걷듯 읽어 내려간 그의 인내와 깊이는 회원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대하소설 속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들이 회장의 목소리를 빌려 테이블 위에 펼쳐질 때, 독서회는 시대를 넘나드는 역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느린 독서’야말로 효율성만을 따지는 현대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죽비와 같다.

오는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다.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스페인의 전통에서 유래된 이날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다시 ‘종이책’과 ‘독서모임’에 주목하고 있다. 이른바 ‘텍스트힙(Text Hip)’ 열풍이 불며 젊은 세대들이 지역 독서 모임을 찾아 나선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다. 휘발되는 디지털 정보에 지친 영혼들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본질’과 ‘대면의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공유하는 행위는 AI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다.

‘푸른 독서회’의 테이블 위에는 늘 책과 함께 사람의 온기가 놓인다. 2008년 작은 씨앗으로 시작해 17년의 나이테를 새긴 이 모임은 이제 동호회를 넘어 지역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었다. 매월 한권의 책을 읽고 모이는 약속이, 누군가에게는 한 달을 버티는 힘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생의 고립을 통과하는 등불이 된다.

창밖으로 4월의 푸른 잎들이 돋아나고 있다. ‘세계 책의 날’을 하루 앞둔 오는 22일 수요일에도 어김없이 ‘푸른 독서회’의 모임은 이어질 것이다. 17년 전 취재 현장에서 느꼈던 그 설레는 떨림은 여전하다. 좋은 책은 혼자 읽어도 좋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 읽을 때 그 문장은 비로소 삶의 궤적이 된다. 우리는 이번 주 수요일에도 각자의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읽을 것이다. 그동안의 세월이 증명하듯, 사람과 책이 만나는 그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푸른 풍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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