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해 5월 19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5' 기조연설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대만의 영향력이 막강해지며 한국의 ‘반도체 왕좌’가 흔들리고 있다.
대만은 반도체 산업을 국가 주도의 ‘원팀’으로 만들어 설계부터 마무리까지 통합 시스템을 운영하는 전략을 고도화했는데, 한국도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이와 같은 국가급 단위의 유기적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빅테크의 '운명공동체' TSMC… 입지 강해져
16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반도체 시장분석 전문기관 세미애널리시스와 트렌드포스는 TSMC가 지난해 연간 매출 1225억4000만달러(약 183조3400억원)를 기록해 글로벌 파운드리 점유율 69.9%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TSMC는 2024년(900억8000만달러·약 135조원) 대비 무려 36.1%의 매출 증가를 이뤄냈으며, 점유율도 64.4%보다 5.5%포인트 올랐다.
엔비디아·애플·구글 등 주요 빅테크를 중심으로 TSMC에 대한 신뢰도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와 애플의 핵심 파트너로서 TSMC의 지위는 공고하다.
대만계 미국인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엔비디아는 자사의 인공지능(AI)용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첨단 패키징(후공정)을 전량 TSMC에 맡기고 있다.
엔비디아의 GPU에는 중앙처리장치(CPU),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여러 반도체를 하나로 묶는 패키징 기술이 핵심인데, TSMC가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엔비디아가 원하는 수준의 물량을 대량으로 소화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TSMC뿐이다.
TSMC 대만 공장. 사진=TSMC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더라도, TSMC의 패키징 처리 능력이 AI 산업 전체의 속도를 결정짓는 결정적 병목 구간이 될 것으로 평가한다.
반도체 제조 기술 그 자체보다 이를 최종 제품으로 구현해 내는 TSMC의 물리적 생산 한계가 AI 진화 속도를 좌지우지하는 최대 변수가 됐다는 뜻이다.
애플과 TSMC 또한 단순한 위탁 관계를 넘어 서로가 ‘핵심 중의 핵심’ 협력 관계가 형성됐다. 애플 칩 설계-공정-패키징 과정에서 애플과 TSMC는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애플은 TSMC의 새로운 공정이 나올 때마다 그 물량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가져간다.
대표적으로 TSMC의 최첨단 파운드리 2나노미터 공정은 올해 애플이 초기 물량의 50%를 선점했다. 경쟁사인 퀄컴이나 미디어텍 등이 남은 50%를 갖고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TSMC의 막대한 신규 공정 개발비를 선제적인 대량 주문으로 보전해주고, TSMC는 애플 칩에 최적화된 공정 수율을 가장 먼저 잡아주는 상부상조 구조를 이루고 있다”며 “단순 갑을 관계 이상으로 ‘운명공동체’를 구축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
◆생존 위협에서 발전한 대만 반도체… '대체불가'
이처럼 TSMC가 세계 파운드리 70%를 점유하자, 대만이 현시대 ‘AI 생산 사령부’가 된 과정에 업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엔비디아와 애플이 TSMC를 선택한 것은 앞선 기술력도 있지만, 설계도만 넘기면 완제품까지 쏟아져 나오는 대만의 촘촘한 ‘반도체 네트워크’ 자체를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CNBC와의 인터뷰에서 “대만의 반도체 생산 역량 40%를 자국으로 옮기겠다”고 발언하자, 황 CEO는 대만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디지타임즈 인터뷰에서 “미국이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짓고 생산 역량을 늘리는 것은 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차원이지, 대만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이는 미국 반도체 생산망 투자는 폭증하는 AI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증설’이지 궁극적으로 대만의 생산망을 대체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2023년 11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도 황 CEO는 “미국이 공급망 독립을 이루려면 적어도 10년에서 20년은 걸릴 실질적이지 않은 목표”라며 “엔비디아의 최신 서버에는 전 세계에서 온 3만5000여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데, 이 복잡한 공급망의 중심에는 대만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발언은 대만에서 크게 화제가 돼 당시 현지 언론들은 “대만 반도체 생태계의 승리”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젠슨 황(오른쪽) 엔비디아 CEO와 모리스 창 TSMC 창업자가 2022년 미국 피닉스에 건설 중인 TSMC 공장 현장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실제로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는 첨단 메모리 및 물량 중심의 한국과는 달리 설계-파운드리(제조)-패키징으로 이어지는 ‘원스톱 시스템’을 탄탄하게 발전시켰다.
이는 대만 경제를 강력하게 견인하고 있다. 대만 정부 통계 기구인 행정원 주계총처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8.63%라고 발표했는데, 15년 만에 최대다. 1인당 GDP도 3만9477달러를 기록해 한국(3만6107달러)을 추월했다.
대만 반도체 생태계는 TSMC가 리더격을 맡고 있긴 하지만, 반도체 OSAT(패키징·테스트) 분야 세계 1위 기업 ASE(일월광 반도체), 서브 부품이나 기판에서 맹위를 떨치는 UMC, 글로벌 팹리스인 미디어텍, 노바텍, 리얼텍, GUC 등 쟁쟁한 기업이 즐비하다. 반도체 기업은 아니지만 아이폰을 생산하는 곳도 폭스콘이다.
이들 대만 기업은 치열한 경쟁 속에 유기적인 협업과 보완도 함께하며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엔비디아와 애플의 성공이 TSMC의 증설을 유도하고, 이에 따른 장비사 등 협력업체도 동방 성장하는 선순환 고리도 강하게 형성돼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황 CEO를 비롯해 리사 수 AMD CEO 등 반도체 거물이 대만계인 점에 따라 사업 관계 형성이 수월했던 것도 영향을 줬다.
여기에 대만 정부는 반도체 공급망을 사실상 국가 안보 체계로 활용하고 있다.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라고 불리는 이 독특한 환경은 미국과 긴밀한 경제 생태계 구축이 결과적으로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우자오셰 전 대만 외교부장은 “전 세계가 대만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만의 평화와 안정이 전 세계의 번영과 직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비군사적 억지력”이라고 말했다.
제러미 샤피로 유럽외교협회 연구소장도 “대만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현대 문명이 가동되기 위한 필수 부품”이라며 “이 ‘필수불가결성’이야 말로 수십 척의 항공모함보다 더 강력한 방어력을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SK하이닉스 이천 공장. 사진=천성윤 기자
◆한국, 대만 모델 참조해야… '반도체 원팀' 필요
현재 한국 반도체업계는 세계 최대 메모리 공급원으로서 지위를 갖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대만과 같이 종합 패키징 방식의 산업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개별 기업의 독자 생존형 생태계에서 하나의 클러스터 형태로 전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올해 양산 및 출하가 시작된 HBM4(6세대)부터는 제조와 패키징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HBM4는 이전 세대와 로직다이(두뇌에 해당하는 부분)의 역할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HBM3E(5세대)까지는 로직다이가 데이터 통로의 역할이였다면 HBM4부터는 이 로직다이에 초미세 파운드리 공정이 직접 적용된다.
이에 삼성전자는 4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로직다이 제조에 투입해 메모리 설계부터 파운드리 제조, 선단 패키징까지 삼성전자가 직접 다 해내는 원스톱 패키지를 고도화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TSMC와 손을 잡았다. 로직다이를 직접 제조하기보다 TSMC의 공정을 빌려쓰고, 대신 SK하이닉스의 강점인 메모리 적층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제 단순히 메모리를 잘 만드는 것보다 파운드리와 얼마나 긴밀하게 설계 단계부터 협업하느냐가 생존 요건이 된 셈이다. 이 때문에 반도체 산업은 설계부터 후공정까지 한곳에 모여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클러스터 경쟁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난 1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고 있는 현장. 사진=연합뉴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현재 정부 주도로 경기도 용인에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조성 중이다.
삼성전자는 남사·이동읍에 약 360조원을 투입해 6개의 팹(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시스템 반도체 국가산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150여개 국내외 소재·부품·장비 기업과 팹리스가 함께 입주해 파운드리-설계 협력을 극대화 한다.
SK하이닉스는 원삼면에 추정 투자액 총 600조원을 들여 거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건설한다. AI 수요에 따라 물량 주문이 밀려와 이르면 내년 초 가동을 시작할 방침이다.
정부도 보조를 맞춰 올해 초 반도체 특례법을 강화했다. 패스트트랙을 도입해 통합 인허가 시스템을 진행, 산단 조성 기간을 7년에서 3년 이상 단축했고 전력과 용수 등 핵심 인프라도 정부가 직접 챙기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대만과 같이 국가가 하나의 반도체 팀으로 움직이려면 클러스터화는 필수”라며 “클러스터 내 기업들이 인프라를 공유하며 설계와 제조의 간격을 좁히고, 물류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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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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