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의 주제는 ‘고원(故園)’이다.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그립고 정든 고향, 오래되고 편안한 풍경을 의미한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풍경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안에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과 평온함이 남아 있다. 나는 이러한 익숙한 풍경을 사실적인 모습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며 쌓아온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바라보고 표현하고자 했다. 실제의 3차원적인 공간을 화면 안에서 2차원적인 조형으로 재구성하고, 풍경을 이루는 형태와 선들을 단순화하고 겹쳐 놓음으로써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풍경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고자 한다. 실제 풍경과 달리 여러 선과 형태가 겹쳐지면서 풍경의 윤곽이 흐려지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오래된 기억 속 풍경과 같은 아련한 느낌이 만들어지는데, 모두 기억 속 풍경과 연관된다.
색을 사용하는 방식 또한 실제 사물의 명암이나 고유한 색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화면 전체의 구도와 색채가 서로 어우러지는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각각의 사물을 구분하기 위한 색이라기보다 화면을 하나의 색면으로 바라보며 색과 색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풍경은 구체적인 장소의 모습보다는 하나의 분위기와 감각으로 다가오게 된다. 특히 아크릴 물감이 가진 가볍고 선명한 색감에 머무르지 않고, 오랜 시간 고민해 온 색채의 관계를 통해 차분하고 깊이 있는 화면을 만들고자 했다.
내가 그리는 고원은 실제로 존재했던 특정한 장소를 그대로 옮겨놓은 풍경은 아니다. 오랜 시간 바라보고 기억해 온 여러 풍경들이 화면 안에서 다시 만나 만들어진 나만의 전원 풍경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작품에서는 평온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에서는 조금은 낯설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고원’을 그리는 이유도 그곳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보다는, 우리가 지나치고 있는 평범한 풍경을 잠시 바라보게 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내 그림을 통해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오래된 풍경을 떠올리고, 그 안에 있었던 평온함과 따뜻함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배기찬 작가
※ 배기찬 작가는 일본 구주산업대학 대학원 예술연구과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후쿠오카시 DON화랑을 비롯해 대구 예맥화랑, 바람꽃 화랑에서 세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후쿠오카시미술관 류파전과 서·일본 미술제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일본과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1993년부터 2014년까지 경북과학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미술협회와 이상회, 영토전, 경북구상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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