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경남은행 자금시장본부(김창효 상무대우) 기고
인공지능 혁명은 디지털 기술의 정점으로 여겨지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물리적 토대 위에 서 있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이 주목하는 ‘HALO’는 이러한 역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개념이다. Heavy Assets(중자산)와 Low Obsolescence(낮은 노후화 위험)의 약자인 HALO는, AI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이 더 이상 코드나 알고리즘에만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제 시장의 화두는 누가 더 똑똑한 AI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가 그 AI를 돌릴 전력과 설비를 확보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지난 십여 년간 자본시장은 자산 경량화를 미덕으로 삼았다. 공장 하나 없이 아이디어와 소프트웨어만으로 거대 기업이 된 플랫폼 사업자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AI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이를 구동하기 위한 전력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전력망 확보가 가장 큰 진입 장벽이 되는 이른바 ‘파워 월(Power Wall)’ 현상을 초래했다. 복제가 쉬운 무형의 기술과 달리, 거대한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실물 인프라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강력한 경제적 해자(Moat)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동안 소외됐던 전통 산업의 재평가를 불러오고 있다. 전력 유틸리티, 에너지 인프라, 대형 제조업 등은 막대한 초기 자본이 필요하고 구축에 오랜 시간이 걸려 그간 따분한 산업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가 기존보다 수 배 이상의 전력을 소비하는 현실에서, 이들 중자산 산업은 기술적 유행에 쉽게 대체되지 않는 ‘낮은 노후화 위험’을 무기로 시장의 중심에 섰다. 특히 안정적인 베이스로드 전원을 공급하는 원자력과 초고압 변압기 등 전력 설비 분야는 이미 새로운 슈퍼사이클의 입구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거시 경제와 국가 정책의 흐름 또한 이러한 중자산 회귀 전략을 뒷받침한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CHIPS Act)은 단순한 산업 지원을 넘어, 핵심 제조 시설과 에너지 인프라를 자국 내에 직접 구축하려는 물리적 통제권 확보 전략이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자본 지출은 기업들에게 효율성 중심의 외주 생산 대신 견고한 실물 자산 보유를 강요하고 있다. 결국 인프라를 직접 통제하는 능력이 기업과 국가의 생존을 결정짓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물 자산 중심의 성장이 장밋빛 미래만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인프라 구축에는 막대한 자본뿐만 아니라 환경 규제 대응과 지역 사회의 합의라는 행정적 제약 사항이 뒤따른다.
또한 경쟁국들이 핵심 광물이나 소재 공급망을 무기화할 경우, 아무리 견고한 중자산이라도 가동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현실적 한계도 존재한다. 따라서 HALO 전략의 성패는 물리적 자산의 확보를 넘어, 이를 둘러싼 대외 환경의 제약 사항을 얼마나 입체적으로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결론적으로 AI 시대의 패권은 가상 세계의 알고리즘을 현실 세계의 인프라가 얼마나 단단하게 받쳐주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것은 지능이지만, 그 지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전력과 하드웨어다. 무겁지만 견고한 자산,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인프라 구조를 가진 기업들이 AI 혁명의 과실을 향유할 주인공이 될 것으로 보인다.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이제 다시, 실체가 있는 현실 세계로 돌아오고 있다.
뉴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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