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참배하고 있다.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은 최근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스타벅스 가야지"라는 5·18 조롱 응원 구호로 공분을 샀다. 사진=연합뉴스
조국 전 대표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베식 ‘노’ 말투를 개탄하는 포스팅을 한동안 이어갔다. 여성아이돌그룹의 영상 발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퍼진 이른바 ‘일베식’ 언어 풍조의 심각성을 지적하려는 의도였다는 해명도 덧붙였다. 조롱과 혐오의 문화가 심각하다는 그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그럼에도 그의 포스팅이 그렇게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해명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그 걸그룹의 ‘무섭노’ 발언과 관련된 포스팅으로 오해할 만했다. 6·3 보궐선거에 실패하고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이어진 조국 전 대표의 ‘관심 행보’에 대한 비판도 더해졌다.
정치인의 이 같은 행보가 조롱과 혐오 문화 개선에 도움되는지가 관건이다. 비판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조차 극단적인 진영정치의 담론으로 전화돼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치적 목적에서 진영의 권력투쟁 도구로 동원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음모론적 증오를 권력투쟁의 동력으로 삼는 경향이 유난히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 요즘 한국정치의 현실이기도 하다. 증오·재난의 아픔을 권력투쟁의 재료로 활용하는 반사회적 정치 풍토다.
이번에도 일베 문제를 극우 정치로 연결시켰다. 동조하는 언론도 그대로 증폭시켰다. 2010년대 초반에 논란의 대상이 됐던 일베 커뮤니티의 유산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처럼 보인다. ‘밈’(Meme) 도구의 확산과 더불어 관심을 끄는 혐오의 문화의 유포도 용이한 환경이다. 그러나 일베식 문화로 통칭하기엔 세월과 더불어 조롱의 정치 대상도 바뀌었고, 다양한 형태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콘텐츠들이 있다. 극단적인 정치 유튜브를 중심으로 생성·확산되는 음모론과 분열적 증오정치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 ‘가야지, 스타벅스’ 구호가 정치戰으로
얼마 전 있었던 배재고 야구팀 ‘가야지, 스타벅스’ 조롱 구호 파장 때도 그랬다. 스포츠에서 상대를 조롱하는 구호의 한계와 그 책임 문제를 따지기 이전에 바로 5·18 실상과 역사의식에 대한 성토와 더불어 정치진영의 공방이 돼버렸다. 그 조롱 구호가 5·18에 대한 조롱이었기보다는, 탱크데이 사태 이후 ‘스타벅스 철수론’과 ‘스타벅스 가자’는 양분된 인식의 차이를 지역적으로 겨냥한 정도로 본다. 그렇더라도 지역에 대한 조롱이 포함된 것이고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5·18 역사의식의 문제로 비화시켰고 관련 단체·정치권이 가세했다.
다행스럽게도 서로의 용서와 화해로 매듭짓기는 했다.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배재고 교장 선생님과 용서하고 격려하는 광주일고 교장 선생님의 화해의 장면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심판대에 올린 이후 강요된 불가피한 화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화해 이후 “조롱 구호는 스포츠맨십 문제가 아니라 5·18과 그 역사에 대한 조롱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한 성직자의 글을 보았다. 포용보다는 증오·응징을 동원하는 정치적 기제의 폐해를 새삼 확인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고 5·18 묘지를 단체로 참배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파시즘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인이 됐지만 ‘파리의 택시 운전사’로 살다가 귀국했던 홍세화 선생이 ‘톨레랑스’, 즉 관용과 포용을 진보의 화두로 던졌던 민주화의 막바지 시절이 떠오른다. 톨레랑스는 다양성이 존중 받으며 공존하는 프랑스 문화를 떠올리는 개념이었고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화두였다. 그가 한국사회의 불관용 문화의 배경으로 보았던 국가권력의 독선적 태도, 독재를 비판하는 의미로도 쉽게 다가왔다.
이제는 톨레랑스를 가치로 담았던 세력들이 국가권력을 주도하는 집권세력이 됐다. 집권 세력 이전에도 이미 정치적으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됐다. 20여 년 전 그렇게 호응하고 내세웠던 관용과 다양성의 포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평등·박애의 공화국 구호를 내건 프랑스 혁명 세력이 배타적 독재세력이 돼버린 역사적 현실은 이미 알려진 바다. 혁명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비민주적 조직원리가 집권 이후에 그대로 이어졌다는 분석에서부터 저항세력으로서 구호와 집권세력으로서 실제는 다르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또 내거는 구호와 자신의 실제는 다르다는 홍세화 선생의 지적처럼 ‘내로남불’의 역설적 현실이기도 하다. 어쩌면 정치제도, 정치문화, 정치리더십의 덕목 등으로 통제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기 쉬운 권력에 내재된 보편적 속성일 수 있다.
반인권적, 반민주적, 반공동체 권력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관용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민주화 운동 시기 독재권력은 타도의 대상이었고, 현 집권세력은 그런 투쟁에 헌신했던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자임한다. 물론 집권 세력의 전체 기반이 아니고 일부이지만, 그들 스스로 민주화 세력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 공헌을 인정받아 권력을 누리는 사람도 있고, 20년 이상의 집권 역사에서 다양한 세력이 혼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이제 비판과 견제의 대상인 권력 집단이 되었고, 다양성을 통제했던 반민주적 정권을 반면교사 삼아야 하는 주체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관용할 수 없는 적대 세력이 있다고 보고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적대적 청산보다 포용과 통합에 주력했다. 이른바 ‘DJP연합’이라는 연합정권의 성격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국내 정책뿐 아니라 대북·대일 정책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권력투쟁의 정치현실에서 일정한 적대적 대립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탄핵을 배경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에서는 ‘적폐청산’의 국정 구호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며 국정 동력으로 삼았다. 물론 ‘진영의 대통령’, ‘진영의 권력’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라고 당선 소감에서부터 확언했다. 기존 체제를 뒤엎는 혁명 정부가 아니라, 기존 헌법 체제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의정부로서 당연한 인식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일고)와의 경기 도중 5·18 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응원 구호를 외쳤다가 6개월 출전정지 처분을 받은 서울 배재고 야구부가 8일 재심을 신청하기로 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 강동구 배재고등학교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 진영정치 극단화, ‘대립 정치’ 두드러져
그러나 진영정치가 점점 극단화하면서 적대적 대립의 정치가 두드러졌다. 진영정치의 강화 배경에는 민주화 이후 대의명분이 실종된 카르텔 정당정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시대의 정치환경 등 여러 요인이 있다. 더구나 탄핵을 배경으로 집권하고 권력투쟁의 전략 정치에 익숙한 현 여권 세력은 상대를 ‘악(惡)’으로 보는 정의 독점의 사고 경향이 강했다. 이재명 정부 또한 탄핵을 배경으로 ‘내란세력 청산’을 집권 1년의 명분이자 정치전략으로 삼았다. ‘적폐청산’에서 ‘내란세력 청산’으로 이어진 셈이다.
국가권력을 주도하는 정권이 불관용의 사회문화를 증폭시켰다고 비판했던 그들이다. 이제는 자신들이 사회문화의 황폐화시키는 권력의 행태를 재현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확대된 시대적 변화를 감안한다면, 오늘날 권력의 정의독점 사고는 그 시절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독일의 칼 슈미트(Carl Schmitt)는 정치 현상의 핵심을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나타나는 ‘적과 동지’ 현상을 설명하는 현실주의자의 입장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경직된 ‘적과 동지’ 론은 전쟁의 정치가 되고 배타적 패권정치나 독재로 흐르게 된다. 슈미트의 ‘적과 동지’ 정치론은 나치의 정치이론이 되었다고 알려진다. 국가 공동체 내부의 특정 집단을 교도하거나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전체주의 체제가 그렇다.
이 같은 점에서 청산론에 의존하는, 심지어 음모론을 이용하거나 실제 이상으로 과장해 허깨비 적을 설정하는 우리의 정치 풍토가 청산되어야 한다. 주체적 비전이 아니라 적을 설정한 증오의 정치로 아군을 결집시켜 권력투쟁의 자산으로 삼는다. 그들의 권력투쟁 자산으로 유용하지만, 사회는 황폐화 된다.
특히 재난과 사회적 슬픔을 치유하기보다는 권력투쟁을 위한 갈등의 자원으로 동원하는 행태는 정말 심각한 문제다. 5·18,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처럼 재난이나 비극적 참사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매우 민감한 일이다. 이 같은 민감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이용하는 정치행태들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망각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스스로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이다.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끊임없이 소환하면서 오히려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배재고 야구팀의 조롱 구호를 5·18에 대한 몰상식과 역사의식 빈곤으로 책임을 물어 어떤 효과를 보았는가. 가시적 응징 조치가 있었지만 문제의 핵심처럼 거론했던 그들의 역사의식은 개조됐는가. 애초에 역사의식의 문제였던가. 5·18 정신의 보편적 확산 계기가 되었는가. 오히려 증오와 갈등만 불러온 채 소비되지는 않았는가. 이로 인해 보편적 가치로서 5·18 정신을 정파적 문제로 만드는데 일조하지는 않았는가.
사회적 재난까지도 정치적 도구화하는 정치는 참 나쁘다. 아픔과 슬픔을 공유하고 치유하는 책임정치가 아니라면, 오히려 잔인한 정치다. 더불어 “설령 절대적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을 동원해 그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것은 폭력이고 반문명이다”라는 명제를 정의독점 사고의 정치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싶다. 모두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권력자가 정의독점 사고를 행사하면 전체주의가 된다.
※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만흠 전 국회입법조사처장 weeklyhk@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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