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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록되지 않은 한일여실고 학생들 마음을 찾다 [언니야 보고싶다]

2006년 마산 한일합섬에 남았던 마지막 굴뚝이 철거된 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일대 8만 9000여 평을 가득 채웠던 한일합섬은 마치 하나의 도시와도 같았다.

기록되지 않은 한일여실고 학생들 마음을 찾다 [언니야 보고싶다]

■마산 한일합섬 기억 찾기-언니야 보고 싶다 (3) 신주현 언니야

한일전산여고 출신, 경남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일여실고 기록 연구

2006년 마산 한일합섬에 남았던 마지막 굴뚝이 철거된 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일대 8만 9000여 평을 가득 채웠던 한일합섬은 마치 하나의 도시와도 같았다. 공장과 더불어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열 동이 넘는 기숙사가 함께 자리하며 마산의 풍경과 삶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틈틈이 배움을 이어가던 이들이다. 그들이 벌어 보낸 돈은 고향의 살림을 지탱했고, 그 손길은 1970~80년대 한국 산업화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또렷이 남아 있지 않다. 한일합섬 사보와 수출탑, 기념사진이 남아 당시의 성과를 말해주지만, 그 안에서 삶을 버텨낸 소녀들의 얼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한 시대를 떠받친 구체적인 삶이 기록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학교에서는 친구로, 공장에서는 언니와 동생으로 서로를 불렀던 이들. 그들이 건네던 ‘언니야’라는 이름은 이제 어디에 닿아 있을까. 2023년 경남여성가족재단이 구술 기록으로 그 기억을 책으로 남겼고, 이후 영화와 전시, 연구로 이어지는 움직임도 조금씩 쌓이고 있다. 이 기획 연재는 그 흐름 위에 서 있다. 흩어진 목소리를 다시 불러 모아, 이름 없이 지나간 ‘언니야’들의 삶을 한 번 더 세상 앞으로 불러내려는 작은 시도다.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일여실고에 대해 기록 연구를 한 신주현언니야가 <경남도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주성희 기자

신주현(37) 언니야는 지난해 6월 ‘공동체 아카이브 관점에서 본 여성 노동-교육 기록화 전략’을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사례 중심으로 연구해 발표했다.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 출신인 주현언니야는 이 연구로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기록이 부족한 점을 전했고, 당시 노동자이자 학생이었던 청소년들이 이중 정체성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주현언니야는 기록을 찾아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과거가 다르게 해석되지 않으려면 당사자들의 기억과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록연구자 신주현언니야의 의문들

“한일여실고 졸업생 모두 똑같이 김수한 초대 이사장에게 감사한 마음만 들었을까? 다양한 생각들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주현언니야가 연구하면서 품었던 의문이었다. 누군가는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고, 누군가는 노동과 학업을 동시에 할 수 밖에 없어 절실했다 하더라도, 부당함을 느끼는 이가 없었을까 하는 물음.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조에 가입하고 싶었던 마음이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학생들을 공장에 배치할 때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했다고 본다. 교대를 하지 않는 반에 가거나, 사무직을 맡는 학생들은 글씨를 예쁘게 쓴다던지, 목소리가 좋다던지 외적인 면을 이유로 힘들지 않은 과에 갔다. 그런 조건이 붙는다는 걸,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했다는 걸 알았는지 궁금했다. 한일합섬 제품은 일정한 기준에 따라 생산됐겠지만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일률적일 수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주현언니야가 연구 중에 한일여실고 졸업생을 만나고자 약속을 했다가 파투난 경험이 있다.

주현언니야의 논문 소재는 마산 YMCA에서 한 Y형제단 활동 기록이었다. Y형제단은 한일합섬 여공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1981년에 시작했을 때는 독서 모임, 기술역량 강화 활동이 모임의 주요 목적이었다.

주현언니야가 입수해서 연구에 썼던 자료는 YMCA 연맹 노동교육실이 주관한 ‘YMCA 노동형제단 전국대회’를 앞두고 작성한 안내문이다. 노동 형제단 운동의 조직 방식과 지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1차 자료다.

이 대회 목적은 경험 공유, 운동에 대한 확신, 통일성 확보, 지도력 향상으로 꼽힌다. 이는 노동운동이 개인 경험을 집단적 정체성과 조직역량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주현언니야는 여러 기록을 분석하면서 당시 한일합섬 여공들은 노동운동을 하길 원했다기보다는 부족한 공부에 대한 열망이 앞섰을 것이라고 봤다. 민주화운동 아카이브에서는 한일합섬 여공들의 노동운동 기록을 몇 개 발견했지만 그 이후 활동에 대해서는 찾지 못했다.

주현언니야가 주목하는 이중 정체성은 그들이 노동운동에 발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들이 노동자로서 처지만 갖고 있었다면 1987년에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생 신분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퇴학, 자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학구열이 강한 이들인데 ‘자퇴, 퇴학’의 꼬리표를 감수하면서 노동운동을 벌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거다.

주현언니야가 던진 물음들은 밝혀지지 않은 기록, 또는 기록되지 않은 기록과 함께 합일합섬 옛터에 묻혀있다.

기록 찾아 연구하는 일 계속해야

한일여자고등학교 50년관 앞에 있는 1억불·2억불·4억불 수출의 탑 모습. /주성희 기자

주현언니야도 한일여자고등학교에 세워진 50년관을 둘러봤다. ‘1억불 수출의 탑’에 김한수 초대 이사장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본 주현언니야는 위화감을 느꼈다.

“1억불 달성은 김 이사장만의 업적은 아니다. 많은 남자·여자 노동자도 있었을 텐데. 졸업생 사진이라도 1억불 달성 탑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김 이사장 덕분에 한일여실고 학생들이 일할 수 있었고, 동시에 교육의 기회를 얻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주현언니야에게는 1억불 달성 탑 옆에 여전히 허전해 보였다.

자유수출무역지구에 외국계 기업들이 들어서고, 복지가 좋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에 한일합섬도 위기의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바로 옆에 있는 공장으로 인력이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주현언니야는 “학교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학생을 받았던 것만 봐도 급하게 추진했던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지 않나”하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주현언니야가 아쉬워했던 것은 그 많던 여성 노동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었다. <경상남도 교육 70년사>가 2015년께 발간되었다. 주현언니야는 그 책에 한일합섬과 한일여실고에 대한 설명이 없어 적잖이 놀랐다. 그는 “한일합섬 사보에 담기지 않은 내용이 한일여실고 교지인 ‘한일샘’에 수록돼 있을 수 있다. 최대한 많이 모아놓고 사보와 비교하면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남아있는 사진과 문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그때 일하고 공부했던 언니야들의 감정을 찾고 이를 역추적해 1970년대, 1980년대로 돌아가보는 것, 이를 기록해두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 기록에 의미를 두는 이유는 당시 1970~1980년대 서울에 있는 공단으로 가는 여공들 상황과 한일여실고·한일합섬에 왔던 여공들의 상황과 처지를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없어서였다. 마산에서 다시 마산으로, 전국에서 마산으로 왔는데 도시를 동경했을 리 없다. 집안을 일으켜세워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주현언니야는 “산업체 부설학교라는 특성을 고려해야한다. 이들은 공부, 학업에 대한 열망이 컸을 것”이라면서 “여공보다는 학생이라는 보호막을 울타리로 삼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여실고 졸업생들이 힘들었던 과거를 자부심으로 치환하는 까닭을 되짚어 보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벌수도 있었지만 공부를 선택했던 자신,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일여실고에 다녔던 학생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괜찮았다’라고 위로해주는 연구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엄마를 이해하며 언니야들을 이해하며

마산 한일합섬이 철거되는 마무리 단계에서 찍은 사진. 2006년 6월 5일자 사진이다. /경남도민일보DB

이번 인터뷰는 주현언니야의 어머니와 함께 하려 했다. 주현언니야가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건 그의 어머니 영향이 컸다.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현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을 졸업한 어머니는, 당신이 어릴 적 한일여실고를 다니고 싶어해서 딸들에게도 권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일대에서 가장 큰 공장인 한일합섬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이 어머니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지역민이 한일여실고·한일합섬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어머니에게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 인터뷰가 성사되진 않았다.

주현언니야는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한일여실고에서 공부하면서 한일합섬에서 일했던 여공들 상당수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이유를 되짚었다. 그러면서 “딸들이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듯, 엄마도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현언니야는 엄마가 자신의 어릴 적 선택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안정적이고 사무직으로 일하는 딸에 비해서 엄마는 자신이 초라한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딸들은 엄마가 지금까지 일하는 게 대단하다고, 그 직업이 엄마를 말해주지 않는다고 답한다. 직업은 돈 버는 수단이지 엄마의 정체성이 아니니까. 엄마의 꿈이 좌절돼 그런 걸까. 엄마에게 딸들의 직업은 상처가 됐다. 동시에 자기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기가 전면에 나서는 걸 부끄러워한다. 딸들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본인 스스로가 괜찮지 않은 것이다.”

한일여실고를 졸업한 어머니들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때 어떻게든 돈 벌겠다는 선택보다 친구들이 책 한 장 볼 때 같이 따라서 책을 볼 걸 싶은 후회일 수도 있다. 부모에게 반항이라도 해서 일하지 않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걸 싶으면서도, 지금 남아있는 졸업장이 자기 자신감이면서 내 선택에 대한 증명이라고 스스로 위로 하기도 할 것이다.

이중잣대 속에 있는 주현언니야

마산 한일합섬이 철거되는 마무리 단계에서 찍은 사진. 2006년 6월 5일자 사진이다. /경남도민일보DB

주현언니야가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전산’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각인이 있었다. 마산에 있는 인문계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과 한일전산여고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걸 재학중에도 느꼈다. 나중에서야 그런 시선이 차별이라는 걸 알았다.

주현언니야가 학생이었을 때는 예와 효를 중요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친구들과 웃으며 교문으로 뛰어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정문에 들어서기 1m 앞에서부터 “저는 효녀입니다”를 외치고 들어가야 했다. 휴대전화 사용금지는 물론이다. 교칙도 엄격했지만 학생부의 기강이 같은 학생을 억누르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주현언니야는 연구에서 한일여실고에서 공부하며 일했던 언니야들이 이중적인 정체성과 감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주현언니야 또한 자신을 계속해서 증명해야 하는 시간을 거쳤기 때문일테다. 또 어머니가 있었기에 한일여실고 졸업생 언니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한일여실고와 한일합섬에서 좋지 않은 일이나 상황도 있었을텐데 그런 부분을 숨기는 언니야들을 바라보는 답답함도 있다.

주현언니야는 “자기 자신을 인정할 줄 알았으면 한다.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묵혀두고 모르는 척 한다면, 과거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니 당당해지자”라고 말했다.

※이 시절 한일합섬·한일여실고 언니야들을 더 만나고 싶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으신 분은 주성희 기자(010-9211-4818·hear@idomin.com)에게 연락주세요.

/주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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