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와 글로벌 자금 이탈 압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가운데, 한국 증시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의미심장한 행동 패턴을 보이고 있다. 대형 반도체주인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매도 우위를 보이는 반면, 전자부품 기업인 삼성전기에는 대규모 순매수로 대응하고 있다.
이와 관련 일시적인 종목 교체를 넘어, AI 시대 산업 구조 변화에 대한 선제적 베팅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외국인 순매수 1위 종목은 삼성전기로, 총 1808억원이 유입됐다. 같은 기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삼성SDI 등이 뒤를 이었지만, ‘반도체 완제품’이 아닌 ‘핵심 부품 기업’이 1위에 오른 점은 시장의 시선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국인이 중동전쟁 발발 이후 코스피 시장에서 대대적인 매도공세를 펴면서도, 삼성전기에 관한한 강력한 매수우위를 보인 점도 주목된다.
지난달 3일부터 이달 3일까지 외국인 투자자는 국내 주식시장에서 총 35조1611억원을 순매도했다. 특히 삼성전자를 한 달 동안 18조4075억원어치 팔았다. 이는 전체 순매도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규모이다.
증권가는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 주요 증권사들은 30만원대였던 삼성전기의 목표주가를 일제히 상향 조정했다. NH투자증권과 SK증권 60만원, 유진투자증권 59만원, 유안타증권 55만원, 현대차증권 54만원 등이다. 3만원) 등도 목표주가를 상향해 제시했다. 삼성전기 주가는 1년 전만 해도 12만원을 밑돌았던 삼성전기 주가는 지난 3일 종가 기준으로 45만 6천원이다.
증권사들은 삼성전기에 대한 기업 가치 재평가에 나서는 분위기이다. 삼성전기의 투자 매력이 재평가되는 핵심 배경은 단순한 실적 개선이 아니라 사업 구조의 질적 전환에 있다.
과거 스마트폰과 PC 중심의 정보기술(IT) 사이클에 의존하던 부품 공급 구조에서 벗어나, 인공지능(AI) 서버와 데이터센터라는 고성장 인프라 시장으로 축을 이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 제품인 MLCC(적층세라믹콘덴서)는 전기를 저장하고 흐름을 안정화하는 부품으로, 기존에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에 주로 사용됐다. 그러나 AI 서버는 대규모 연산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 많은 수량과 더 높은 성능의 MLCC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물량 증가를 넘어 고부가가치 제품 비중 확대를 의미한다.
또 다른 핵심 제품인 FC-BGA(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 즉 고급 반도체 패키지 기판)는 반도체 칩을 기판 위에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기존에는 PC용 수요가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GPU와 AI 가속기 등 고성능 반도체가 집약되는 데이터센터로 수요가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AI 연산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칩 간 연결 밀도와 정밀도가 중요해지면서 FC-BGA의 전략적 가치도 함께 상승하는 구조다.
이같은 변화는 제품 다변화를 뛰어넘는 산업 포지셔닝의 이동을 촉진한다. 스마트폰 부품 시장이 성숙 단계에 접어든 반면, AI 인프라 시장은 초기 성장 국면에 있어 구조적 수요 확대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AI 서버 한 대에는 기존 IT 기기 대비 훨씬 많은 MLCC와 고사양 FC-BGA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삼성전기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결국 시장이 주목하는 것은 매출이 아니라 ‘수요의 성격 변화’다. 삼성전기는 범용 전자부품 기업에서 AI 인프라 핵심 부품 공급자로 전환하며, 경기 민감 산업에서 구조적 성장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외국인 자금 유입과 밸류에이션 상승의 근거로 작용하며, 향후 주도주 재편의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변화의 본질은 ‘칩의 수’다. AI 연산이 고도화될수록 GPU와 메모리, 네트워크 칩이 폭증하고, 이를 연결하는 기판과 전원 안정화 부품 수요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NH투자증권 황지현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AI 인프라 고도화 과정에서 칩 수가 구조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FC-BGA 기판 수요도 함께 늘어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성능 경쟁이 곧 부품 수요 확대로 직결되는 산업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MLCC 가격 상승 가능성도 주목된다. 업계 1위인 일본 무라타가 지난 2월 가격 인상을 검토하면서, 삼성전기 역시 가격 인상 여력을 확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따라서 판매량 증가가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질지 여부가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과거 IT시장 사이클에서는 물량 증가가 곧 가격 하락으로 이어진 측면지 크다. 하지만 AI 인프라 시장에서는 고성능·고신뢰성 제품 중심으로 가격 방어력이 강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같은 흐름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근거로 SK증권의 분석이 주목된다. SK증권은 삼성전기가 단순히 ‘기대감’이 아닌 ‘실적 사이클’의 초입에 진입했다고 진단한다. SK증권 박형우 연구원은 “연초부터 MLCC 주문이 늘고 있고, FCBGA 가동률이 상승 중이며 주요 부품들의 ASP도 오르고 있다”며 “FC-BGA는 풀캐파 가동을 향해 가파르게 상승 중”이라고 밝혔다. 판매량 증가에 가격 상승이 동반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우선 연초 이후 MLCC 주문 증가가 확인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는 AI 서버 및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실제 발주로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수요 기대가 주가를 선행했다면, 현재는 실수요가 먼저 움직이는 국면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동시에 FC-BGA 사업의 가동률 상승도 구조적 변화의 신호다. 가동률 상승은 단순 생산 확대를 넘어 수익성 개선과 직결된다. 특히 풀캐파에 근접할수록 공급 제약이 발생하며, 이는 가격 협상력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주요 부품의 ASP(평균판매가격) 상승이 동반되고 있다는 점은 이번 사이클이 과거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량 증가와 가격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중 상승 국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술 경쟁력이다. 삼성전기는 고객 맞춤형 수동소자를 고집적 패키지 기판 내부에 삽입할 수 있는 설계 역량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단순 부품 공급을 넘어 반도체 패키지 구조 설계 단계부터 관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영역이다. 결국 삼성전기는 범용 부품 기업이 아니라 AI 인프라 설계 생태계에 참여하는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SK증권의 분석을 종합하면, 삼성전기가 ‘수요 증가 → 가동률 상승 →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에 진입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외국인 자금 유입의 배경을 설명하는 동시에, 단기 트레이딩이 아닌 중장기 산업 재편 흐름 속에서의 재평가 국면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해석된다.
삼성전기에 대한 외국인 자금 유입은 시장 주도권의 이동이라기보다, AI 인프라 확대에 따른 수익 구조 변화 가능성을 선반영하는 흐름으로 해석된다. 반도체 완제품 중심의 기존 사이클이 여전히 시장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지만, 데이터센터와 AI 서버를 중심으로 부품 수요가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투자 시선이 일부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주도주 교체라기보다, 산업 내 가치 축이 점진적으로 다변화되는 초기 국면으로 보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해석에 가깝다.
양준서 기자 pretty.yang7658@gmail.com
양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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