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과학영웅 11인, 과학 어울림 마당 18일 '출현' 과학수도 대전 빛낸 개척...

삼성전자를 이끈 권오현 전 회장,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임형규 전 사장 등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전 세계가 여전히 브라운관 TV에 머물던 시절, 그는 이미 박막 트랜지스터(TFT)와 액정 디스플레이(LCD)의...

과학영웅 11인, 과학 어울림 마당 18일 '출현' 과학수도 대전 빛낸 개척...

오는 18일 대전 한빛탑~한밭수목원 '과학자의 길' 조성

'과학어울림마당' 개최···시민 참여형 과학문화 행사 마련

故 최형섭·한필순 등 대한민국 과학기술 이끈 11인 재조명

인터넷·원자력·반도체 등 국가 성장 이끈 과학자 발자취 소개

대덕연구개발특구 중심 대전, 과학도시 정체성 확산 기대

오는 18일 과학어울림마당에서 만나게 될 과학영웅 11人. AI를 활용해 영웅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을 연출해봤다. [사진=대덕넷]

우리는 이순신의 명량해전,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들의 이야기는 교과서를 통해 달달 외운다. 영웅들의 서사는 우리 민족적 자부심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1가구 1전화 시대의 개막,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초고속 인터넷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지키는 미사일이 어떤 사투 끝에 탄생했는지를 아는 이는 드물다.

오는 18일대전 한빛탑광장에서 한밭수목원으로 이어지는 길에 조성될 '과학자의 길'은 그래서 특별하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11명의 과학자 배너를 만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 있지만, 이들이 남긴 유산은 우리가 매일 쓰는 스마트폰, 심지어 우리 헌법에 이르기까지 삶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이 11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대전과 맞닿아 있다.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사전 예습'을 돕기 위해 이날 마주할 거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 대한민국 과학의 판을 바꾼 남자

故 최형섭 장관. 그는 대덕연구단지 조성, 해외 우수 과학자 유치, 기술 국산화를 주도하여 대한민국 기술 자립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사진=대덕넷DB]

한국 과학기술 행정의 아버지로 불리는 故 최형섭 박사는 대전고등보통학교(現 대전고)를 졸업한 대전의 아들이다. 그가 훗날 허허벌판이던 대덕 땅을 세계적인 과학도시로 탈바꿈시킬 청사진을 그리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민족이 부강해지려면 제련 기술이 필수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세계적인 금속학자로 거듭났다.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는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대 소장 시절이다. 당시 그는 해외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던 한인 과학자들을 조국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그의 호소는 강렬했다.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분은 해외 연구소에 남으십시오. 하지만 조국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싶은 분들은 지금 바로 돌아옵시다."

그의 진심에 18명의 천재 과학자가 응답했고,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역두뇌 유출' 사례가 되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KIST 연구실은 그렇게 대한민국 중화학공업과 반도체 신화의 산실이 되었다.

1971년부터 7년 6개월간 과기처 장관을 지낸 그는 역대 최장수 장관 기록을 세우며 대전의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1973년부터 기획한 대덕연구단지 건설은 그의 가장 거대한 유산이다. 화학, 기계, 전자, 원자력 등 각 분야의 전문 연구소들을 대덕 땅 한곳에 모아 시너지를 내게 한 그의 구상은 오늘날 'K-사이언스'의 심장이 되었다.

그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연구의 자율성을 지켜냈고, 그 울타리 속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닦았다.

최 장관은 후배들에게 '연구자의 5대 덕목'을 남겼다.

"학문에 거짓이 없어야 하고,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으며,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른느 것을 반성해야 한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대덕연구단지 후배 과학자들의 가슴속에 나침반처럼 새겨져 있다. 그는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과학의 힘으로 나라를 세운 진정한 건국 공로자 중 한 명이다.

◇ 대한민국 표준을 만든 과학자

故 김재관 박사.  [사진=대덕넷DB]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앞에 한 유학생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방안'이었다. 대통령은 감격해 그의 손을 오래 잡았다고 전해진다. 그 유학생이 故 김재관 박사였다.

1967년 대한민국 제1호 유치과학자로 귀국한 그는 포항종합제철소 건립을 주도했다. 세계은행 등 국제 기구들이 30만 톤 소규모 제철소를 권고하는 동안 그는 103만 톤 규모를 고집했다.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관철시켰다. 훗날 포스코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게 된 규모의 경제는 그 고집에서 비롯됐다.

이어 1973년에는 모두가 반대하던 국산 고유 모델 자동차 개발을 현대자동차에 설득해 밀어붙였다. 1975년 포니가 출시되며 한국은 세계 16번째 고유 모델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대전과의 인연은 그 이후 시작됐다. 대덕단지 1호 입주 연구소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대 소장을 맡은 그는, 미국이 한국을 '2차 표준기관'으로 묶으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1차 표준기관으로 출발했다. 1978년 대한민국은 비로소 자신만의 시간 표준을 갖게 됐다.

포항제철의 청사진에서 출발해 대전 대덕에 국가표준의 뿌리를 내리고, 국가표준제도를 헌법 제127조 제2항에 명문화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한 김재관 박사는 오늘날 대한민국 모든 정밀 산업의 기준점을 대전에 세운 인물이다. 그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에너지 자립이 곧 독립"

故 한필순 박사. [사진=대덕넷DB]

평안남도 출신의 故 한필순 박사는 "에너지 자립 없이는 진정한 자주독립도 없다"는 신념을 품은 전략가였다. 그는 1982년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한필순 박사는 이북 출신으로 전쟁을 겪으며 자유와 나라의 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구보다 절감한 사람이었다. 원자력을 '머리로 캐는 에너지'라고 불렀던 그는 석유도 석탄도 없는 나라에서 원자력만이 에너지 독립의 답이라고 믿었다.

1984년 원자로 계통설계 자립을 선언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자전거 만드는 나라가 비행기를 설계하겠다는 격이라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실패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44명의 연구진을 미국 윈저로 보내며 공항에서 '필(必) 설계기술 자립'을 세 번 연호했다.

3년의 사투 끝에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귀국한 연구진이 가져온 기술은 한국 표준형 원자로(KSNP)로 완성됐다. 이 기술은 2009년 UAE 원전 수출의 토대가 됐고, 이제는 원천 기술을 가진 미국조차 한국에 원자력 협력을 요청하는 시대가 됐다.

핵연료 국산화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1995년에는 대전에서 세계 최고 성능의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를 완공했다. 이 모든 업적의 무대가 대전이었으며, 한필순 박사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 TDX에서 '우리별'까지···집념의 국산화

故 최순달 박사. [사진=대덕넷DB]

미국 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우주선 통신장치 책임자로 활동하며 기술상을 수상할 만큼 촉망받던 故 최순달 박사는 조국의 부름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1976년 귀국했다.

1980년대 초, 전화 한 대 값이 집 한 채 값에 육박하던 심각한 통신난 속에서 그는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의 수장을 맡아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에 뛰어들었다. 모두가 "한국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며 비웃을 때, 그는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배수의 진을 쳤다. 이것이 전설로 남은 '혈서 각서'다.

그 결과 1986년 TDX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 10번째 전전자교환기 보유국이 되었고, 이는 오늘날 IT 강국 코리아의 초석이 됐다.

그의 도전은 우주로 이어졌다. 1989년, 그는 KAIST 제자 20명을 영국 서리대학으로 보내며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하러 가는 만큼, 위성 제작 기술을 못 배워오면 태평양에 빠져 죽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스승의 절박함에 감응한 제자들은 낯선 땅에서 휴지통을 뒤져 도면을 찾고 밤을 지새우며 기술을 익혔고, 마침내 1992년 대한민국 첫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쏘아 올렸다.

"남의 별"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꿋꿋이 기술 국산화를 밀어붙여 1999년 독자 설계한 '우리별 3호'를 성공시킨 그의 집념은 오늘날 대전의 위성 기업 '쎄트렉아이'로 계승되어 세계 우주 시장을 누비고 있다. 그는 "사회와 국가에서 받은 혜택을 잊지 마라"는 '보은'의 철학을 몸소 실천한 스승이었다.

◇ 대한민국 방산 출발점 만든 과학자

이경서 박사. [사진=대덕넷DB]

1970년, KIST 연구실에서 대한민국 산업 지형을 바꿀 기념비적인 보고서 하나가 완성됐다. 제목은 '기계공업 육성방안'. 작성자는 MIT에서 기계공학 학·석·박사를 마치고 갓 귀국한 이경서 박사였다.

이 보고서는 조선업을 선도산업으로 삼아 소재·부품·조립으로 이어지는 기계공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담고 있었다. 정부는 이 내용을 전격 수용했고, 이는 훗날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과 창원 기계공업단지 조성의 기술적 모태가 됐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긴박한 국가적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1969년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군 철수 위기가 닥치자 자주국방을 위한 장거리 유도탄 개발의 총괄 책임이 그에게 맡겨진 것이다. 당시 한국은 정밀 부품 하나 가공할 수 없는 국방 기술의 불모지였고, 선진국 어느 나라도 핵심 기술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 박사는 미국의 추진제 공장이 폐업하며 설비를 매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낡은 공장 설비를 통째로 사들여 오고, 영국 페란티사와 극비 계약을 맺어 관성유도장치 기술을 6개월간 전수받는 등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사투를 벌였다.

보안 유지를 위해 연구진은 가족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못한 채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연구실을 지켰다. 그 절박함 끝에 1978년 9월, 사거리 180km의 대한민국 최초 탄도미사일 '백곰'이 안흥시험장에서 성공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7번째 독자 탄도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정밀 기계 가공 기술은 민간 산업으로 파급되어 국내 제조업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퇴직 후에도 그는 대전에 단암시스템즈를 설립해 나로호와 누리호에 들어가는 항공전자 장비 국산화에 매진했다. 2024년 과학기술유공자로 지정된 그의 생애는 중화학공업의 설계에서 방산 강국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K-방산이 서 있는 거대한 기반 그 자체다.

◇ 한국 화학의 기초를 세운 故 이태규 박사

故 이태규 박사. [사진=대덕넷DB]

대한민국 과학기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은 故 이태규 박사다. 그는 대한민국 화학이 학문적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31년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식민지 출신이라는 차별을 실력으로 극복하고 교토제국대학 정교수 자리에 올랐다. 이는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독보적인 성취였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학장을 맡으며 대한화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내는 등 황폐했던 조국의 학문적 기반을 닦았다.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유타대학에서 헨리 아이링 교수와 함께 발표한 '리-아이링 이론'은 화장품, 연고, 자동차 엔진오일처럼 끈적임이 있는 액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 현대 화학공학의 기초가 됐다. 세계 과학 교과서에 그의 성(姓)이 박혔고, 196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 화학상 후보에 공식 추천되는 영예를 안았다.

1973년, 71세의 고령임에도 조국의 부름에 응해 KAIST 초대 석좌교수로 영구 귀국한 그는 1989년 KAIST가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이 도시에 마지막 터를 잡았다. 새벽까지 논문을 손질하고 제자들의 취직을 손수 챙기는 헌신은 90세까지 이어졌다. 1992년 10월, 평소처럼 연구실을 지키다 퇴근 후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그의 생애는 마지막까지 대전과 함께였다. 현재 KAIST 도서관 입구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으며,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그는 지금도 대덕의 후배들을 지켜보고 있다.

◇ 대한민국 인터넷의 시작

전길남 박사. [사진=한국전자통신연구원]

'S-n-u-c-o-m.'

1982년 5월,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의 컴퓨터 화면에 알파벳 여섯 글자가 하나씩 떠올랐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연구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대한민국이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에 연결된 순간이었다. 그 연결을 만들어낸 사람이 전길남 박사다.

재일교포 2세로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 보이저 탐사선 시스템 설계에 참여했다. 누가 봐도 탄탄한 미래였지만, 어릴 때부터 품어온 "조국에 돌아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 그를 1979년 귀국길로 이끌었다.

귀국 후 그는 정부가 원하는 컴퓨터 하드웨어 국산화보다 컴퓨터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킹'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이 "네트워킹은 무엇에 쓰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이, 그는 반쯤 비밀리에 연구를 이어갔다. 핵심 장비인 라우터 반출이 미국에 의해 금지되자 소프트웨어로 그 기능을 직접 구현해 벽을 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결이 바로 그날의 환호성이었다.

이후 KAIST에서 26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넥슨 창업자 故김정주, 리니지 아키텍처를 설계한 송재경 같은 인재들을 길렀다. 인터넷은 모두의 것이라는 신념으로 일본·중국 등 이웃 나라에도 기술을 전파했고, 2012년 인터넷 소사이어티(ISOC)의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어린 시절의 다짐 하나가 한 나라의 IT 역사를 바꿨다.

◇ 대한민국 화학 자존심, 유기광화학 개척자

故 심상철 박사. [사진=대덕넷DB]

故 심상철 박사는 대한민국 화학계의 자존심이자, 빛을 이용한 화학적 변화를 연구하는 '유기광화학'의 개척자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당대 최고의 수재였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뉴욕대학교(NYU)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세계적인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 미국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그는 1971년 조국의 부름에 응해 갓 설립된 한국과학원(KAIS, 현 KAIST)의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당시 한국에서 '유기광화학'은 이름조차 생소한 미개척지였다. 그러나 심 박사는 기초 학문의 깊이가 곧 국가 경쟁력이라는 신념으로 불모지를 일궈냈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교수가 아니었다. 1989년 KAIST가 대전으로 이전했을 때, 그는 삭막한 연구 현장을 지키며 대덕연구단지가 단순한 기술 개발 기지를 넘어 인류의 지능이 응집된 '지성소(Sanctuary of Intelligence)'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학원장과 KAIST 제8대 원장(1994~1995)을 지내며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의 진가는 330여 편의 방대한 논문과 그가 길러낸 100여 명의 제자들에게서 드러난다. 심 박사의 지도를 받은 인재들은 현재 국내외 학계와 산업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한국 화학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과학은 정직해야 하며, 그 열매는 인류를 비춰야 한다"던 그의 철학은 2002년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대덕의 밤을 밝히는 연구실의 불빛으로 남아 있다.

◇ 반도체 강국의 출발점···'김충기 사단'

김충기 박사. [사진=대덕넷DB]

반도체의 고향이 대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대덕의 ETRI에서 대한민국 반도체의 자존심인 4M DRAM이 세계 최초급으로 개발되었고, 그 핵심 인력 상당수가 대전 KAIST에서 양성되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 김충기 박사가 있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를 마친 그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 중 하나였던 페어차일드에서 세계 최초로 500화소 CCD 선형 영상감지소자를 개발했다. 오늘날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 이미지 센서의 원형이 되는 이 혁신적 기술로 동료들 사이에서 'CCD 교수'라 불릴 만큼 촉망받던 그였지만, 1975년 조국을 위해 귀국길을 택했다.

KAIST에 부임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연구실에 설비를 들이는 공사였다. 당시 반도체 설비 하나 없던 척박한 토양에서 그는 3년에 걸쳐 반도체 집적회로 제작 설비(클린룸)를 손수 설치했다. 제자들이 직접 웨이퍼를 구우며 현장의 감각을 익히게 한 그의 헌신 덕분에, 이후 20년 가까이 KAIST는 반도체 공학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요람이 되었다.

그의 연구실을 거쳐 간 100여 명의 석·박사 제자들은 훗날 '김충기 사단'이라 불리며 한국 반도체의 신화를 완성했다. 삼성전자를 이끈 권오현 전 회장,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임형규 전 사장 등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전 세계가 여전히 브라운관 TV에 머물던 시절, 그는 이미 박막 트랜지스터(TFT)와 액정 디스플레이(LCD)의 미래를 간파하고 제자들에게 그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이론보다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머슴 정신'과 '엘리트 서비스 정신'을 강조했다. 반도체에서 디스플레이까지, 오늘날 한국을 먹여 살리는 핵심 산업 지도는 그가 대전 연구실에서 밤낮없이 칠판을 메우며 가르쳤던 '엔지니어의 마음(Engineer's Mind)'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는 초격차 전략의 뿌리는 바로 대전의 그 연구실에 깊이 박혀 있다.

◇ 대전의 과학부자 故 최기철·최남석

(왼쪽)故 최기철 박사, (오른쪽)故 최남석 박사. [사진=대덕넷DB]

故 최기철, 최남석 박사는 120년 역사 대전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과학자다. 부친 최기철 박사는 우리나라 민물고기 연구의 아버지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한반도 전역의 민물고기 서식지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조사·기록했다.

아들 최남석 박사는 대전 바이오 기업들의 대부다. LG화학 연구원 초대 소장으로 부임해 세계적 항생제 '팩티브(Factive)' 등 신약 개발에 기여했다. 그가 채용한 수많은 박사들이 오늘날 대전을 대표하는 기업인 알테오젠, 리가켐바이오사이언스, 펩트론, 와이바이오로직스, 인투셀 등을 창업해 대전을 바이오 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 기업들이 대전의 부를 창출하고,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인구도 늘게 했다.

최기철 박사의 과학정신은 아들 최남석 박사에 이어졌고, 그 정신은 바이오 기업은 물론 대전이 대한민국 과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과학 명문가로 대전 시민이라면 꼭 기억해야할 인물이다.

11인의 과학 거인을들 추천한 김근배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초빙교수는 "이들은 단순한 전문 지식인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사회 발전을 이끈 진정한 주역들"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보통 과학기술을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만 평가하려 하지만, 과학기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삶의 궤적과 교육적 헌신, 사회적 공헌, 그리고 고결한 인품까지 입체적으로 마주하게 된다"며 "과학기술사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과학을 이해하는 지평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서사를 통해 국민은 과학으로부터 진정한 감동을 느끼고 존경심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김 교수는 과학기술계 내부의 인식 전환을 주문했다. 그는 "해외 과학자는 높게 평가하면서도 정작 우리 곁의 동료와 선배들의 가치는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며 "과학기술계 스스로 앞선 이들을 인정하고 기리는 문화가 성숙되어야 비로소 사회적 존경도 뒤따를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