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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상백 교수의 미술 속 건강이야기] 진단되지 않는 고통…'돌봄'으로 ...

반면 수전 맥팔레인의 는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백혈병을 앓는 아이가 요추천자 시술 후 잠든 모습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시술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고상백 교수의 미술 속 건강이야기] 진단되지 않는 고통…'돌봄'으로 ...

고상백 연세대 원주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의학은 오랫동안 질병을 설명하고 치료하는 학문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는 병의 원인을 찾고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설계하는 과정을 통해 고통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또 모든 치료가 기술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미술은 바로 그 지점, 즉 의학이 닿지 못하는 고통의 영역을 집요하게 드러낸다.

머빈 피크의 <나는 나아졌다가 나빠집니다, 선생님 (I Waxes and I Wanes, Sir)>은 그러한 고통의 가장 불안정한 상태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병상에 누운 환자와 그를 찾아온 인물을 그린 단순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해석되지 않는 질병 상태에 대한 깊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침대에 누운 환자의 얼굴이다. 그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둥글고 부풀어 있으며 눈과 입의 위치 또한 어딘가 어긋나 있다. 이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자기 신체에 대한 인식의 왜곡, 즉 질병이 신체를 넘어 자아의 감각까지 침범했음을 암시한다. 환자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낯설게 경험하는 존재가 된다.

그 앞에 서 있는

방문자는 몸을 기울이며 환자를 향하고 있지만 그 관계는 연결되지 않는다.

그의 주머니에 있는 약병은 치료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그 무력함을 드러낸다. 약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해결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는 당시 머빈 피크가 경험했던 상황—여러 의사를 만났지만 명확한 진단도, 효과적인 치료도 얻지 못했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다.

방 안의 공간 역시 안정적이지 않다. 벽지에 반복되는 붉은 기하학적 문양은 시각적으로 강한 압박을 주며 현실의 공간이라기보다 인지가 뒤틀린 내면 공간을 연상시킨다. 침대 앞 바닥에 앉아 있는 붉은 여우는 이 장면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이다. 이 동물은 현실적 맥락과 연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환각이나 불안, 또는 죽음의 전조와 같은 상징으로 읽힌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이 그림은 하나의 상태를 구성한다.

질병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없는 상태, 즉 의미를 상실한 고통의 상태

이다.

머빈 피크. 나는 나아졌다가 나빠집니다, 선생님(1944)

머빈 피크 자신은 불면, 우울, 기억력 저하, 환각 등의 증상을 겪었지만 당시 의학은 그에게 명확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여러 의사와 신경과 전문의를 찾아갔지만 돌아온 것은 서로 다른 설명과 불완전한 치료뿐이었다. 후대에 와서야 그의 상태는 루이소체 치매로 추정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단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낸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다.

질병은 있지만 의미는 없다. 고통은 있지만 설명은 없다. 이 지점에서 의학은 흔들린다. 의학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질병이 정의돼야 한다. 하지만

정의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의학은 잠시 멈춘다.

또

그 틈에서 환자는 혼자가 된다.

반면 수전 맥팔레인의 <잠으로 견뎌내기 (Sleeping it Off)>는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백혈병을 앓는 아이가 요추천자 시술 후 잠든 모습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시술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시간이다.

곁에는 간호사 또는 돌봄자가 앉아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극적인 장면도 없다. 하지만 바로 이 평범함 속에서 작품의 의미는 드러난다.

아이의 몸은 침대 위에 안정적으로 놓여 있다. 깊이 잠든 얼굴은 고통의 절정을 지나온 뒤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 잠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고통 이후에 주어지는 회복의 시간이다.

그 곁에 앉아 있는 성인의 존재는 이 그림의 중심을 이룬다. 그는 의료진일 수도, 다른 돌봄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라 그의 태도이다. 그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다.

그 시선은 분석이나 판단의 시선이 아니라

돌봄과 보호의 시선

이다.

병실의 내부는 따뜻하고 밝은 색조로 구성돼 있으며 이는 긴장과 안정이 동시에 공존하는 상태를 만들어낸다. 특히 창밖으로 보이는 밝은 풍경은 중요한 대비를 형성한다. 병실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대비되는 외부의 빛은 아직 닿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삶의 지속 가능성, 즉 희망을 암시한다.

수전 맥팔레인. 잠으로 견뎌내기(1996)

이 작품에서도 질병은 여전히 존재한다. 치료 역시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관계 속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치료는 단순히 병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인간을 지켜내는 과정이다. 머빈 피크의 작품에서 의학은 실패한다. 진단은 불완전하고 치료는 무력하며 환자는 고립된다.

반면 수전 맥팔레인의 작품에서 의학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완치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돌봄은 지속

된다. 또 그

돌봄은 환자를 고통 속에서 완전히 붕괴되지 않도록 붙잡는다.

이 두 작품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하나는 묻는다. “의학이 설명하지 못할 때, 환자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다른 하나는 답한다. “의학이 인간적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현대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우리는 질병을 더 정확하게 분류하고 더 빠르게 진단하며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통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때로는 고립된다. 수치와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고통은 종종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기술만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고통을 이해하려는 태도와 그 곁에 머무르는 능력

이다. 머빈 피크의 환자가 던진 질문—“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완전한 답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전 맥팔레인의 그림은 다른 방식의 응답을 제시한다.

정확한 답이 없더라도 우리는 공감하거나 그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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