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단국대 교수·동경대학 방문연구원
일본은 동북아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 주요 변수다. 2026년 기준 명목GDP 순위는 미국-중국-독일-일본 순이다. 일본은 2010년 중국에, 2023년 엔저 여파로 독일에 3위 자리를 내주며 4위로 밀려났다. 재래식 군사력 지수 역시 미국-러시아-중국-인도 순이고 일본은 7위에 그친다. 이 숫자만 보면 일본은 예전만 못한 국가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해상자위대 전력, 기초 과학기술·반도체·소재·로봇 분야에서 기술 우위 그리고 세계서 가장 촘촘한 안보 네트워크인 ‘미일동맹’을 유지하며 동북아 4강의 한 축을 이룬다. 최근 일본이 방위비를 GDP 2% 수준까지 늘리고 ‘적 기지 반격능력’을 확보하는 등 일본 자체 위기감이 일본 안보와 경제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보수 정치와 노령화 사회가 일본 개혁에 장애가 되기는 하지만, 보수 정치세력이 다카이치 시나에를 앞세워 진행하는 국가 개혁은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 패권은 포르투갈·에스파냐에서 네덜란드로, 다시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넘어왔고 이제 중국도 그 자리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 오랜 패권 교체기에 비서구권 국가로 유일하게 강대국 반열에 이름을 올린 국가가 일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실제 이겨본 경험,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에도 한국전쟁·베트남전쟁 특수를 발판 삼아 1968년 세계2위 경제대국에 오른 국가를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지난해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이 대만 유사시를 ‘존립위기 사태’로 규정할 수 있다고 밝히자 중국은 수산물 수입을 재차 막고 희토류 수출을 규제하며 강하게 반발했는데, 트럼프 행정부도 이 발언에 이렇다 할 공개 지지를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워싱턴의 냉담한 반응에도 다카이치 정권이 물러서지 않은 이유는 이 노선에 미국의 지시가 아니라 아베 신조 이래 자민당 보수 주류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독자적 국가안보에 대한 고려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인들에게는 자국이 반세기 동안 통치했던 첫 식민지 대만에 대한 남다른 정서적 애착이 있다. 일본 정치는 정서와 감정을 기반으로 국민 단결을 촉구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일본의 정치적 고려와 계획 및 추진은 말없이 은밀하고 주도면밀하다는 것도 일본 역사가 증명한다. 최근까지 일본 정부 기조는 대중 강경 노선이 총선 압승으로 이어지고, 그 압승이 다시 정치 개혁 동력으로 연결되는 순환 구조가 작동되고 있다. 사회에 널리 깔린 ‘반중 정서’가 정치 동력으로 작용하고 내각은 이를 안보와 경제 정책으로 연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카이치 정권이 중국에는 강경 일변도이면서 한국에는 시종 유화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이 일본에는 강경하면서도 한국에는 유화적이라는 접점을 생각하게 한다. 미국은 이를 관전하며 자국의 국익을 생각하는 상태다. 한국 정부도 국익 우선의 강력하고 유연한 외교가 필요한 이유가 이와 같다.
일본 자민당 내부 정치 노선도 결코 하나는 아니다. 아베·다카이치로 이어지는 계보는 대중 강경과 개헌에 적극적이지만, 기시다 후미오로 대표되는 온건 계보는 상대적으로 실용적이며 대중 관계에 유연하다. 일본은 하나의 목소리로 움직이는 정부가 아니라 여러 계산이 경합하며 결과가 산출되는 체계를 갖춘, 위기에 변화하는 내각 정치를 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뜻을 거스르지 않지만, 단순한 미국의 그림자는 아니다. 자신의 역사 경험과 국내 정치 셈법에 따라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세계 선진국 중 하나다.
‘적의 적은 우리의 우방’이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우리 우방의 적이 자동으로 우리의 적이 될 수 없듯이, 우리와 역사적 앙금이 있는 일본 역시 자동으로 우리의 적일 수도, 무조건적 우군일 수도 없다. 과거사에 대한 원칙은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하고 강제동원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 있는 태도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결코 낮출 수 없다. 그러나 그 원칙을 지키는 정책과 안보·경제·기술 영역의 실리를 계산하는 협력이 가능한 것이 한일관계다. 원칙과 실리는 서로 배타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성숙한 정부가 마땅히 두 손에 붙들어야 할 국가 이익이다.
/김진호 단국대 교수·동경대학 방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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