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정체성만으로 살아남는 시대는 끝났다.
복합 커리어의 완성은 결국 '선택'과 '집중'에 있다.
(서울=국제뉴스) 서광용 기자 = 한때 필자의 명함에 직함이 네 개였다. 중장년 전문강사, 겸임교수, 대표이사, 경영 컨설턴트 등 처음 만나는 분들은 종종 이렇게 물었다. "그 중에 본업이 뭔가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 "전부가 본업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세월이 지나면서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복합 커리어의 진짜 가치는 여러 역할을 동시에 유지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경험들이 서로를 깊게 만들면서 하나의 방향으로 모여가는 과정 거기에 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 무역 30년 임원의 길, 그리고 새로운 출발
대학 졸업 후 종합상사에 입사하여 첫 해외 출장지는 홍콩이었다. 홍콩과 중국에서 소싱해 유럽과 러시아로 내보내는 3국 중계 무역으로 시작했다. 이후 중동 GCC 6개국 수출 총괄을 맡아 사우디, UAE, 쿠웨이트 바이어들과 오랜 신뢰를 쌓았고, 미주 신규 시장 개척까지 더해지며 어느새 30년이 지나 있었다. SK네트웍스 글로벌운영팀장으로 부문 해외사업 RM을 총괄하던 2018년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가 전면 발동되면서 진행 중이던 거래들이 한순간에 멈춰섰다. 계약도 맺었고 선적도 됐는데 급작스런 규제 발동으로 감당해야 했던 손실과 더욱이 꼼꼼이 점검하지 않았으면 더 큰 손실로 이어질 뻔했던 일들의 그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임원 마지막 무렵에는 SK그룹 행복나래 주관의 사회적기업 경영자문을 맡았다. 그룹이 지원하는 스타트업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자리였다. 좋은 제품을 가지고도 수출 판로를 못 찾거나 규제 정보 하나 없어 첫발을 내딛지 못하는 기업들을 보며 많이 당황하였다. 30년 동안 대기업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었다.
SK를 떠난 뒤 스타트업 어반랩스(Urban Labs)의 COO로 합류했다. 이번에는 구경꾼이 아니라 당사자였다. 자원은 늘 부족하고 모든 게 불확실한 환경이었지만, 오히려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는 법을 거기서 배웠다. 그 무렵 핀란드 알토대학교 Executive MBA를 병행하며 AI와 디지털 전환이 무역 현장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도 공부했다. 이 두 경험이 결국 창업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둘째. 복합 커리어란 무엇인가 — 겸업이 아니다
㈜엑스브릿지 대표이사 이병준 자료제공
복합 커리어를 '투잡'이나 '겸업'과 혼동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겸업은 수입을 나누는 전략이고 복합 커리어는 정체성을 넓히는 전략이다. 그 차이를 가장 실감한 곳은 의외로 강단이었다.
서울 소재 모대학교에서 중동 시장을 주제로 강의하던 때였다. 30년 현장 경험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접하는 학생들의 눈높이에서 풀어내다 보니 오히려 필자 자신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경험들이 언어가 되면서 체계를 갖춰갔다. 현장이 경험을 만들었다면 강단은 그 경험을 지식으로 만들어준 셈이었다.
중장년 인생 2막 설계 강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채워줬다. 수십 년 경력을 가진 분들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강의가 끝난 뒤 나누는 대화가 오히려 더 깊은 배움이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분들도 다음 한 걸음 앞에서는 막막해했다. 쌓아온 것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그 고민이 사실 내 것이기도 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들으면서 정리됐다. 역할들이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서로를 채워주는 구조 — 그게 단순한 겸업과 다른 점이다. 물론 역할이 많아질수록 에너지가 분산되는 함정도 있다. 수렴의 시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결국 무엇이든 조금씩만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셋째. 처음부터 창업 하나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 아닌가?
복합 커리어를 이야기하다 보면 꼭 나오는 반론이 있다. "어차피 수렴할 거라면, 처음부터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이 불편하지 않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의 답은 다르다.
『Range(늦깍이 천재들의 비밀)』의 저자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세계를 두 가지로 나눈다. 엡스타인의 핵심은 환경의 성격에 따라 전문화의 효율이 달라진다는 것이고, 그는 이를 'kind'와 'wicked' 학습 환경으로 구분한다. 체스나 골프처럼 규칙이 고정된 세계(Kind Domain)에서는 일찍 전문화할수록 유리하다. 반면 무역, AI, 창업처럼 규칙이 계속 바뀌는 세계(Wicked Domain)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쌓은 사람이 더 나은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같은 목적지에 도착하더라도 직선으로 온 사람과 여러 길을 돌아온 사람이 보는 풍경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HS코드는 10자리 체계다. 그런데 베트남은 8자리를 기본으로 쓰면서 한국에는 없는 '98류'라는 독자적 분류체계까지 별도로 운용한다. 같은 제품이라도 한·베트남 FTA를 적용하느냐? 한·아세안 FTA를 적용하느냐?에 따라 코드 자릿수와 세율이 달라질 수 있다. 한국에서 확인한 코드와 베트남 세관의 분류가 어긋날 경우 FTA 특혜관세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통관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지연이 생길 수도 있다. 관세청과 KOTRA가 수출 기업들에게 사전 확인을 거듭 당부하는 실제 통관 애로 사항이다. 순수 기술 창업자라면 이 지점을 플랫폼의 첫 번째 기능으로 잡지 않았을 것이다. 현장에서 규제의 무게를 오래 겪어온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넷째. 엑스브릿지(XBridge) — 30년 경험이 AI가 되다
㈜엑스브릿지 대표이사 이병준 자료제공
㈜엑스브릿지는 그 판단 위에 세운 회사다. 수출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친 문제들 — 규제 리스크 사전 점검, HS코드 분류 오류, 해외 인증 요건 확인 — 을 AI 기술로 자동화하는 플랫폼이다. 대기업에는 이를 전담하는 법무팀과 무역 전문가가 있다. 엑스브릿지가 하려는 것은 그 역량을 AI를 통해 중소기업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세 가지 기능이 핵심이다. 수출 전 거래 상대방과 품목의 규제 리스크를 가려내는 스크리닝, 한국과 수출 대상국 기준을 동시에 고려한 HS코드 분류, 그리고 K-푸드와 K-뷰티 기업들이 가장 많이 막히는 해외 성분·라벨 규제 검토다. 세 기능 모두 특허 출원이 완료됐고 벤처기업 인증과 예비창업패키지(딥테크) 선정도 마쳤다. 베트남 현지 파트너 Pinesol VINA와의 MOU를 기반으로 한-베트남 수출 코리더를 첫 타깃으로 시장에 들어가고 있다.
전문가의 경험을 알고리즘에 담는다고 하면 거창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수출 담당자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규제 확인 작업을 AI가 대신 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아낀 시간과 에너지를 정작 중요한 바이어 발굴과 영업에 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다섯째. 내려놓음이 가르쳐준 것
진솔하게 말하자면 강단에 세워주었던 교수직이 계약 종료로 마무리됐을 때 허전했다. 컨설팅 업무도 창업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에서 멀어졌다. 수년간 그 역할들이 전문성을 입증해주는 공식 무대였으니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려놓고 나니 오히려 방향이 선명해졌다. 엑스브릿지 대표이사와 중장년 전문강사 두 축만 남았을 때 집중도가 높아졌고 강단에서 하는 말도 더 날카로워졌다. 역할을 잃은 게 아니었다. 불필요한 것들이 정리되면서 진짜 본업이 드러난 것이었다.
복합 커리어의 완성은 확장이 아니라 수렴이다. 그 수렴이 스스로의 선택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삶이 먼저 결정해주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내려놓은 뒤에 남는 것이 결국 자신의 진짜 자리다.
여섯째. 중장년 전문가가 전하는 세 가지
㈜엑스브릿지 대표이사 이병준 자료제공
강의 현장에서 수많은 중장년 전문가들을 만난다. 20~30년 경력을 가지고도 퇴직 이후의 삶을 막막해하는 분들이 많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면 이렇다.
첫째, 경험을 콘텐츠로 바꿔라. 현장에서 수십 년 부딪히며 익힌 것들은 그 자체가 강의 주제이자 상품이다. 글로 쓰고 강의로 정리하는 순간 '직원'이 아닌 '전문가'가 된다.
둘째, 개인 브랜드를 직접 만들어라. 회사가 브랜드를 대신해주던 시대는 끝났다. 강단이든, 기고든, SNS든 —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접점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 필자가 이 칼럼을 쓰는 이유도 그 연장선이다.
셋째, 내려놓을 때를 두려워하지 마라. 역할을 키우는 것이 출발이라면 정리하는 것이 완성이다. 무엇을 내려놓느냐가 무엇을 쌓느냐만큼 중요하다.
시작이든 전환점이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이면 된다.
※ 외부 기고 및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칼럼니스트
사회적기업 케이마스 자문위원 이병준 교수
이병준 교수
▣ 경력
- ㈜엑스브릿지 대표이사
- 상상우리 중장년 전문강사
- 전문 취업 면접관
- 창업지도사
- 前 명지대학교 겸임교수
- 前 어반랩스(Urban Labs) COO
- 前 SK그룹/행복나래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 컨설턴트(자문위원)
- 前 SK매직 글로벌사업부장(부사장)
- 前 SK네트웍스 · SKC 글로벌 B2B 무역 약 30년
- 핀란드 알토대학교(Aalto Univ.) Executive MBA
- 경희대학교 섬유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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