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특허 정책 변화가 이른바 '특허괴물'의 소송 남발을 부추기고 자국 첨단산업과 국가안보까지 저해할 수 있다는 현지 전문가의 경고가 나왔다.
최근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미국에서 특허괴물의 줄소송으로 막대한 시간과 자금을 허비하고 있는 가운데 미 특허 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오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17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미국 정책 싱크탱크 잭 켐프 재단의 아이크 브래넌 선임연구원은 최근 워싱턴타임즈 기고문을 통해 "미 상무부가 특허상표청(USPTO)에 제안한 특허 정책 변경안에 대해 현상 유지를 개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며 "질 낮은 특허에 더욱 강력한 보호를 제공하는 등 문제를 악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브래넌 연구원은 해당 변경안이 "핵심 안전장치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평가하며 "불명확하거나 일관성 없는 기준으로 정당한 IPR 신청을 기각할 경우 부실한 특허가 검증을 피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도가 약화되면 실제 제조기업들의 희생으로 특허괴물과 그들의 소송 자금 제공자들에게만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변경된 IPR… 갈취 유리해진 특허괴물
미국 특허청 특허심판원(PTAB). 사진=미국 특허청
최근 특허무효심판(IPR) 변경안은 무분별한 특허 소송 억제를 위한 IPR 제도의 신청 절차를 대폭 수정하고 신청 시기와 방법을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IPR은 2011년 도입된 리히-스미스 미국 발명법에 따라 피소 기업이 특허심판원(PTAB)에서 특허 유효성을 신속히 다툴 수 있는 핵심 방어 수단이다.
브래넌 연구원은 트럼프 행정부가 강조하는 미국 제조업 재건과 첨단산업 리더십 확보를 위해서도 균형 잡힌 특허 정책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반도체 제조 시설, 첨단 소재 공장, 생명공학 허브에는 수십억 달러의 초기 자본이 필요한데 IPR이 약화되면 이러한 투자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져 트럼프 대통령이 강화하고자 하는 바로 그 분야들이 타격을 입게 된다"고 지적했다.
특허 사건을 전담하는 워싱턴 D.C.의 연방순회항소법원. 사진=연합뉴스
다만 최근 확산하는 소송을 통한 자금 조달 구조도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브래넌 연구원은 "헤지펀드 등 제조나 연구개발을 직접 수행하지 않는 주체들이 개입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채 자금을 대면서 미국 등 거대 빅테크를 상대로 공격적인 특허 소송을 제기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소송 자금 조달 구조가 공개되지 않으면 외국 세력이 미국의 혁신 기업, 특히 국가 안보에 중요한 기업들을 해치는 조직적 소송 캠페인에 대한 투자를 숨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며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심화하는 시대에 외국 자본이 미국 법체계를 악용할 수 있는 금융 구조를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특허권을 약화시키거나 남용 방지 장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라며 "강력하고 집행 가능한 권리를 유지하고, IPR을 보호하며, 소송 자금 조달의 투명성을 보장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의회와 상무부는 소송을 통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시스템을 왜곡하고 혁신의 가치를 저해하려는 소수 이익집단의 압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괴물에 눈물 흘린 SDC… 석연찮은 판결에 악판례 이중고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양정민 이코노믹리뷰 기자
문제는 특허괴물은 완제품 시장이 형성된 뒤에 소송을 걸어 실제 특허 가치의 수십 배 배상액을 노린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삼성이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전자가 특허괴물에 의해 확정·위험에 노출된 금액은 최소 수천억원대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텍사스 연방법원 배심이 OLED 특허 NPE인 픽티바 디스플레이(Pictiva Displays)에 승소 판결을 내리며 삼성전자에 1억9140만달러(약 2700억원)을 배상하라는 평결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특허 포트폴리오의 본래 경제적 가치는 약 444만달러(약 66억1870만원) 수준이었으나 판결을 거치며 배상액이 지나치게 높아져버렸다.
4500니트 TV용 QD-OLED. 사진=삼성디스플레이
OLED 기술 자체를 개발·양산해 온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자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좋지않은 판례가 나와버린데다 배상액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건까지 합치면 향후 수억~수십억 달러 규모의 추가 청구 위험이 열렸기 때문이다.
배심원 판결이라는 판결 요소도 재판의 당시 불리했던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픽티바 디스플레이를 변호했던 제니퍼 트루러브 맥쿨스미스 대표는 "지난 수년간 텍사스 동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건의 소송을 맡아 의뢰인을 위해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었고 그 경험은 이번 픽티바 디스플레이와의 업무를 이끌어가는 든든한 신뢰와 팀워크의 토대가 됐었다"며 "성공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배심원이었다. 경험상 텍사스 배심원들은 올바른 결론을 내리고 증거를 주의 깊게 경청하며, 재산권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맥쿨 스미스와 아이렐 앤 매넬라 팀 간의 파트너십과 재판 전략에 대한 공통된 접근 방식이 성공의 핵심이었다며 특허가 타인에 의해 사용될 때 공정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텍사스 배심원들은 발명의 진정한 가치를 반영하는 공정한 로열티를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로 접근한 게 주효했다고 역설했다. 결국 상대의 홈그라운드에서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가 불리한 재판을 치룬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직원이 들어가고 있다. 사진=양정민 이코노믹리뷰 기자
이런 가운데 반도체·전자 업계에서는 실제 연구개발·양산의 경우 삼성·협력사들이 했는데 사후 NPE가 거의 ‘성과의 상당 부분’을 가져갔다며 이를 전형적인 특허괴물 사건으로 해석 중이다.
양산·시장 확대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았던 주체가 기술이 상용화되고 삼성 제품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한 뒤에야 소송 제기를 통해 실질 가치보다 수십 배 높은 돈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반도체·전자 업계에서는 실제 연구개발과 양산 리스크를 감수한 주체는 제조사와 협력사인데 상용화 이후 NPE가 소송을 통해 성과를 지분화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고 바라본다. 제품이 시장에서 검증된 뒤 제기되는 소송일수록 협상력이 커지고 배심원 평결 등 변수가 더해지면 배상액이 급격히 확대될 여지도 있다는 이유다.
게다가 반도체·디스플레이처럼 대형 고객·장기 공급 계약이 복잡히 얽힌 산업에서는 소송 리스크가 법적 분쟁에 그치지 않고 특허 분쟁이 기업 손익을 넘어 산업 경쟁력과 직결될 수 있어 논란이다. 첨단 제조업은 설비 투자·연구개발이 선행되는 구조인데 방어 수단이 약화되면 소송 리스크가 곧바로 리스크로 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브래넌 연구원은 “특허를 모으는 데만 전념하는 기업들이 무차별적으로 침해 소송을 제기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경고하며 “남용 방지 장치가 약화되면 제조기업이 희생되고 소송 자금 제공자만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법무팀만으로는 배심원 평결 같은 변수를 통제하기 어렵다”며 “미국 특허 제도 변화가 국내 기업에도 직접 영향을 주는 만큼 정부 차원의 모니터링과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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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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