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형성돼있다. 이들의 성장 뒤에는 성공적인 부품 제조를 지원하는 협력사의 노력도 있었다. 그 협력사 가운데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은 HBM(고대역폭메모리) 제조의 핵심 장비인 TC 본더를 제조하는 기업이다. TC 본더는 HBM 제조의 핵심인 만큼 이를 제조하는 회사는 소위 '슈퍼 乙(을)'로 불린다. 그런데 지금, 이들 '슈퍼 乙'이 회사의 명운을 걸고 싸움을 벌이고 있다. /편집자주
한미반도체 1공장 전경. (사진=한미반도체)
[서울파이낸스 여용준 기자]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의 특허 분쟁은 TC 본더 시장을 넘어 반도체 시장 전반에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자칫 HBM 공급망에 영향이 생길 경우 빅테크들에게도 가격 부담이 생기면서 AI 발전 속도까지 늦추게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두 회사의 특허 분쟁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 지는 반도체 업계 전반의 큰 관심사다. 특허 소송은 그 특성상 손해배상부터 투자비용 손실까지, 막대한 비용 부담을 떠안을 수 있다. 그래서 특허 소송은 경우에 따라 회사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의 분쟁에 따른 파장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SK하이닉스가 양사의 중재자로 나설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정문. (사진=SK하이닉스)
◇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양자 합의' =
특허 소송에서 만약 한미반도체가 승소하게 된다면 쟁점이 된 한미반도체의 핵심 특허는 여전히 유효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특허를 침해한 것으로 인정받은 한화세미텍은 TC 본더에 대한 판매가 금지되면서 한미반도체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반대로 한화세미텍이 승소하게 되면 한미반도체가 주장한 특허는 무효가 되고 한화세미텍은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이로 인해 한미반도체가 보유한 70%대 점유율은 무너지고 시장 경쟁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가능성 외에 업계에서 전망하는 가장 현실적인 결과는 양측이 합의에 이르는 것이다. 합의에 이르게 되면 양사는 특허 라이센스를 공유하고 경우에 따라 로열티를 지불하게 된다. 실제로 두 회사가 반도체 업계에 미치는 파장을 고려하면 SK하이닉스와 같은 대형 고객사가 중재자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
반도체 관련 특허 분쟁에서 양측이 합의에 이르는 경우는 꽤 보편적이다. 2019년 TSMC와 글로벌파운드리는 상대방에 대규모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 분쟁은 양측의 고객사까지 대거 합류하면서 전면전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결국 양사는 장기적인 상호 특허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하고 기존 소송 제기를 모두 취하하는 것으로 결론냈다.
2013년에는 SK하이닉스가 램버스와 진행하던 13년간의 특허 소송이 합의로 종결된 바 있다. 합의 내용은 램버스가 SK하이닉스에 5년 동안 2억5000만 달러의 기술 사용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램버스가 관련 증거를 파기한 것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해지자 내려진 결정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스팬션과 특허 분쟁을 진행했으나 삼성전자가 스팬션에 5년간 매년 250만 달러의 특허 사용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스팬션의 특허를 삼성전자가 침해한 적이 없다고 ITC측이 예심에서 판결했지만 현재 진행중인 소송뿐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인 법적분쟁이 예상돼 전략적 판단에 따라 특허교차사용협약을 맺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 "이미 세메스 상대로 이겼는데"···한미, 장기전 끌고 갈 수도 =
반도체 업계에 미치는 파장을 고려하면 양측이 합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나 한미반도체는 이미 한 차례 특허소송에서 승리한 적이 있는 만큼 쉽게 합의에 이르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1년 한미반도체는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세크론(現 세메스)이 패키지 절단 및 분류 장비에 대한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2017년 대법원 상고 직전 양사의 합의로 마무리됐지만, 그 이전에 1심과 2심 모두 한미반도체가 승소했다. 특히 1심에서 재판부는 세메스에 관련 장비 생산 금지와 함께 한미반도체에 약 22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의 경험을 고려하면 한미반도체는 합의를 진행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세메스와의 소송 사례를 고려하면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이는 차세대 본딩 장비인 하이브리드 본더가 시장에 안착할 정도의 시간인 만큼 사실상 TC 본더 세대에서 양측은 합의 볼 일이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또 한미반도체와 세크론의 특허 분쟁 당시 업계에서는 "고객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면서 이례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가 비일비재하던 상황에서 한미반도체는 기술 특허를 지키겠다는 취지로 대기업과 법정 싸움을 불사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험이 축적된 만큼 한미반도체는 쉽게 합의에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미반도체는 특허 소송 변론기일 이후 입장문을 통해 "법적 절차를 통해 정당한 권리를 끝까지 보호하고, 외부기업의 어떠한 기술탈취 시도에도 단호히 대응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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