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 포스터. 조선 궁궐을 배경으로 한 오컬트 사극. 퇴마사 구천(남주혁)이 현실 세계와 평행하게 겹쳐진 ‘귀의 세계’로 들어가 귀신과 칼로 싸운다. 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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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에는 드라마 ‘동궁’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동궁’(넷플릭스)을 향한 국외 반응이 뜨겁다. 글로벌 80개국 이상에서 차트 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서구의 언론과 평단은 “한국적 오컬트 다크 판타지가 독창적인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고, 한풀이 서사에 인문학적 깊이가 있다”며 극찬을 쏟아낸다. 컴퓨터그래픽(CG), 음악, 연기, 액션까지 흠잡을 데 없다는 중론이다. 그러나 국내 관객들의 반응은 호불호가 엇갈린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국외의 열광과 국내의 미온함
국외 관객들에게 ‘한풀이’는, 서구적 엑소시즘과 다른 독특하고 따뜻한 구원 서사로 읽힌다. 궁궐에서 권력의 희생양이 된 원귀들의 사연을 파헤치는 이야기는 오리엔탈리즘적 호기심을 넘어 인문학적 깊이를 선사한다.
하지만 국내 관객들에겐 다르게 읽힌다. 수십년간 장르물을 소비해온 관객들에게 ‘동궁’은 ‘아는 맛들의 세련된 재조합’이다. 이승과 평행하는 ‘귀의 세계’는 서구 에스에프(SF) 판타지 ‘기묘한 이야기’의 ‘뒤집힌 세계’를, 귀신과 검을 들고 싸우는 감성은 일본 소년 만화 ‘블리치’의 액션을, 궁중 암투와 초자연적 비극의 결합은 좀비 사극 ‘킹덤’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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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억울한 사연을 풀어주면 성불한다”는 프레임이 너무 익숙하다. ‘전설의 고향’부터 ‘신과 함께’, ‘귀궁’, ‘신이랑 법률사무소’에 이르기까지, 한국 관객에게 각인된 서사적 관습이다. 국외 관객이 “악귀를 때려잡는 대신 사연을 들어준다”며 신선해 할 때, 국내 관객에게 귀신의 사연 듣기는 기본 설정이고, 귀신과 싸우는 액션과 궁중 암투극이 승부처가 된다.
‘동궁’ 2회. 귀신의 소리를 듣는 능력을 지닌 옹주 생강(노윤서)이 소금 광에 갇힌 채 타죽은 궁녀에게 궁에 얽힌 비밀을 듣는 장면. 넷플릭스 제공
완성도 높은 미학과 ‘절제’
익숙함이 바탕에 깔려 있지만, ‘동궁’의 미학적 세공술은 단연 최고 수준이다. 시각적 청각적 쾌감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드라마의 진짜 미덕은 케이(K)-드라마의 뻔한 클리셰들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절제의 미학’에 있다. 혹자는 예쁜 남녀 주인공이 등장함에도 로맨스가 옅다거나, 귀신의 외형이 그리 무섭지 않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이는 결핍이 아닌 절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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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노윤서)은 구천(남주혁)의 감시자로 파트너가 된다. 그는 궁중 암투를 파헤치는 수사의 주체이자, 귀의 세계로 들어가는 구천의 조력자이다. 둘은 결국 목숨을 빚진 전우애와 동지적 연대를 쌓는다. 이성애적 로맨스를 넘어선, 인간 대 인간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건강하고 위엄 있는 관계성을 완성해낸다.
드라마는 귀의 세계를 단순히 무섭게 표현하거나 깜짝 놀라게 하는 연출을 쓰는 대신, 궁궐 미장센과 웅장한 그래픽, 무협 액션 등으로 다크 판타지 고유의 환상성과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크로스오버 음악을 활용하는데, 국악 타악기 연주는 어두운 세계관에 스타일리시한 액션의 질감을 불어넣는다. 전투가 벌어진 귀의 세계와 평행하게 존재하는 현실 세계가 비교적 평온하게 유지됨을 보여주는 것도 귀신의 힘을 절제한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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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 6회. 대비(장영남)는 안면 근육 일부에 마비가 왔는지 침을 흘린다. 일그러진 얼굴과 갈라진 목소리로 노욕만 남은 추한 몰골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를 책임지는 것은 역시 배우의 얼굴이다. 과도한 힘을 빼고 눈빛 하나로 선악의 경계를 허무는 통치자를 연기한 조승우, 노욕으로 일그러진 권력자의 기괴함을 마비된 안면 근육과 갈라진 목소리로 소름 끼치게 표현한 장영남, 오도된 욕망과 좌절을 폭발적인 에너지로 뿜어낸 곽동연, 군 복무 후 복귀한 첫 작품에서 한층 깊어진 표정과 무게감으로 성숙한 액션을 소화해 낸 남주혁, 그리고 댄스 뮤직 동영상 ‘범접’에서 보여준 몽환적이고 말간 아우라로 판타지 세계관의 이정표가 되어 준 노윤서까지. 드라마는 기술적 스펙터클을 넘어 한국 배우들이 가진 연기 스펙트럼과 다채로운 얼굴들을 전세계에 증명해냈다.
‘동궁’ 8회. 세자(곽동연)는 죽어서 악귀가 된다. 자신이 왕이 될 수 없다면, 누구도 왕이 될 수 없다며 왕실에 저주를 내린다. 넷플릭스 제공
응징 없는 결말, 권선징악의 해체
드라마가 가닿은 가장 섬뜩한 지점은 오컬트의 탈을 벗겨냈을 때 나타나는 권력의 속살이다. 국내 관객들이 느낀 찜찜함의 근원은 바로 ‘동궁’이 ‘권선징악’이라는 대중 서사의 규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참교육’과 ‘김부장’을 보며 충족되는 사이다 응징과 대리만족의 쾌감을 드라마가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국내 관객이 원하는 원초적 대리만족에 의도적인 거리 두기를 선언한 셈이다.
가령 ‘동궁’에서는 죄악의 전모가 드러나도 권력자들은 아무런 단죄도 받지 않는다. 독살당한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내달리던 생강이 마주한 진실은, 어머니 역시 가해의 구조에 깊이 얽혀 있었으며 자신조차 그 죄의 씨앗이라는 절망이다. “굳이 네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죄지은 자는 다 벌을 받게 된다”던 구천의 대사는 이러한 결말 앞에 무색해진다. 드라마는 수차례 반전을 통해, ‘나쁜 자 옆에 더 나쁜 자, 그 옆에 또 다른 나쁜 자’만 존재하는 온통 추악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처럼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관객은 감정 이입할 좌표를 잃는다. 그래서 “남는 것은 꺼먹살이뿐”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동궁’ 2회. 구천이 꺼먹살이에게 자신의 양기를 조금 나눠주는 장면. 귀매의 일종인 꺼먹살이는 이후 위급할 때마다 나타나 구천을 살려준다. 넷플릭스 제공
법가, 마키아벨리즘, 그리고 통치학
이 지점에서 관객은 왕(조승우)을 중심으로 통치학을 사유해 보아야 한다. 그동안 한국 관객은 영화 ‘올빼미’나 ‘전란’ 속 인조와 선조처럼, 권력욕만 남은 추악하고 비루한 군주를 조롱하며, 민주화 이후의 카타르시스를 곱씹어왔다. 그런데 독재자를 끌어내린 지 이미 오래되었고, 탄핵을 두번이나 겪은 이 마당에, 계속 왕에게 침 뱉고 희화화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남아 있으랴. 이제 우리는 ‘소탈하고 착한 성군’이냐 ‘탐욕적이고 잔혹한 폭군’이냐 하는 유아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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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의 왕은 즉위 과정에 심각한 흠결이 있는 인물이다. 생모 숙빈이 다른 왕자들을 독살하였고, 이를 덮고 귀신과 대비의 짓으로 꾸미려고 더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왕은 어미의 짓을 방조·묵인한 채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다 어머니가 저지른 짓”이라며 남 탓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숙빈에게 “제가 이 자리를 위해 어떤 짓까지 감내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피 묻은 왕좌의 원죄와 책임을 오롯이 자신이 짊어지겠다는 성숙하고 고독한 선언이다.
왕은 역병 마을의 소녀를 보고 연민을 품지만, 통치자로서 국가 전체를 지키기 위해 마을을 도륙하고 불태우라 명한다. 심지어 동정심으로 아이와 아녀자 몇명을 풀어준 병사들까지 다른 병사들이 다 보는 데서 베라고 지시한다. 자신의 권력 탈취 과정을 모방한 세자의 죄를 알아낸 뒤 제 손으로 독살한다. “아버지는 왕이 되지 않았느냐?”라는 아들의 ‘내로남불’ 공격에도 도덕적 결벽증에 빠지지 않고, 자식을 죽인다. 무능하고 권력욕만 남은 자가 왕좌를 차지했을 때 벌어질 국가적 혼란을 막기 위함이다. 왕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정성 따위를 변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에선 귀신들이 감읍해 스스로 흩어질 정도로 진심으로 사죄하고 유족을 책임지겠다 약속한다. 그 와중에도 세자 귀신은 특별히 사멸하라 명한다. 그는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지 않은 채, 왕좌의 무게와 통치 행위에 동반되는 비극적 죄의식을 홀로 떠안는다.
‘동궁’의 왕은 조선의 영조를 떠올리게 한다. 무수리 출신 생모라는 신분적 한계와 경종 독살설이라는 정통성의 원죄, 그리고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비극은 ‘동궁’의 왕과 닮았다. 지금껏 조선 사극에서 그려온 왕은 인과 덕으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유교적 도덕 군주이거나 폭군이었다. 그러나 ‘동궁’의 왕이 보여주는 통치 스타일은 유교의 덕치보다는 법가의 냉혹한 국가 이성에 가깝다. 진실을 제보하는 어린 내관의 용기를 칭찬하면서도,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를 죽인다. 서구에서도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필요한 덕목이 기독교적 도덕성이 아니라,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국가를 지켜내는 냉철한 결단력임을 강조하였는데, 이와 맥이 닿아 있다.
선악을 넘어서는 통치자로서 왕(조승우)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동궁’ 포스터. 피 묻은 권좌의 죄의식을 짊어지고, 악역을 감당하며 고독하게 결단하는 주체의 무게가 느껴진다. 넷플릭스 제공
‘동궁’은 케이(K)-오컬트 사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진지한 정치학을 담고 있다. 소탈함과 도덕적 결벽을 요구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 한국 사회는 온갖 논란과 흠결 속에서도 ‘실용과 통치 능력’을 앞세운 리더십이 전면에 등장하는 새로운 정치적 국면을 맞이했다. 지금 ‘동궁’이 ‘도덕과 선악을 넘어선 통치성’을 보여주는 것은 의미 있다. ‘왕과 사는 남자’에 눈물지으며 여전히 ‘소탈하고 착한 성군’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 “통치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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