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IST 이진준 교수 박사논문 '비어있는 정원', 한국 현대 작가 최초로 영국 애쉬몰린 박물관 영구 소장
- 옥스퍼드 역사상 드문 '수정 없음' 만점 판정… AI 시대 데이터 기술에 동양의 '비움' 미학 결합한 독보적 성과
- 서구 지성사 상징적 공간에 한국적 사유 이식… 학문과 예술 경계 허문 글로벌 문화유산 인정
[서울문화투데이=이은영 기자]루브르 박물관보다 110년, 대영박물관보다 76년 앞선 서양 지성사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영국 옥스퍼드대학 애쉬몰린 박물관(Ashmolean Museum)에 한국 현대 예술가의 학문적 결실이 영구히 각인된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 이진준 교수(미디어 아티스트)가 옥스퍼드대학 박사 과정 중 집필한 10m 길이의 한지 두루마리 논문이 생존 작가로서는 최초로 이 박물관의 정식 구입을 통해 영구 소장된 것이다. KAIST는 26일 이같은 사실을 밝혔다. 영국 옥스퍼드에 위치한 애쉬몰린 박물관은 1683년 설립된 이래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작품을 소장한 세계 최고(最古) 대학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이 생존 작가의 박사논문을 정식 구입해 영구 컬렉션에 포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15세기 조선 산수화 두루마리 전통을 재해석한 10미터 두루마리 형식의 박사논문[empty garden]이 15세기에 건립된 옥스퍼드대학교 유니버시티 교회(University Church of St Mary the Virgin)에 전시된 장면. 2020년.(사진=KAIST)
인공지능(AI)과 데이터가 지배하는 첨단 기술 시대에 동양의 ‘정원’과 ‘비움’이라는 오래된 미학을 결합해 만점 평가를 이끌어낸 이 사건은, 한국의 예술학문 역량이 세계 최고 권위의 문화유산 반열에 올랐음을 시사하는 쾌거로 평가받는다. KAIST는 26일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서구 지성사의 자존심, 한국의 ‘비움’을 선택하다
이번에 소장 결정이 내려진 이진준 교수의 논문 『빈정원 –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의 리미노이드 여행(Empty Garden – A Liminoid Journey to Nowhere in Somewhere)』(2020)은 그 형식부터 파격적이다. 전통적인 책자 형태가 아닌, 10m에 달하는 거대한 한지 두루마리에 인쇄된 이 논문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동양의 산수화를 펼쳐보는 듯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애쉬몰린 박물관 측은 이 논문이 지닌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깊이 있는 학문적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2020년 옥스퍼드대학교 순수미술 철학박사(DPhil) 심사 시 만장일치로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수정 없음(No Corrections)’ 판정을 받은 점은 영국 현지 학계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이는 논문의 논리적 완결성과 독창성이 완벽에 가까웠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인류의 지적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공적으로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더구나 2년 반만에 마치고 얻은 성취로 900년 역사의 옥스퍼드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였다.
일반적으로 옥스퍼드대학교 박사논문은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에 학술 자료로 등록되지만, 이번 사례는 이와 별개로 박물관이 학위 수여 이후 5년간의 독립적 심의를 거쳐 예술·학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구입한 것이다.
▲애쉬몰린 박물관 동아시아미술부 수장고에서 논문[empty garden] 검토 중인 애쉬몰린 박물관의 중국·한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옥스퍼드 대학의 셸라그 베인커(Shelagh Vainker) 교수, 2026.(사진=KAIST)
‘가드네틱스(Gardenetics)’: AI 시대에 던지는 동양적 대안
이진준 교수의 연구 핵심은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술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지각과 감각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에 있다. 그는 서구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패러다임에 대응하는 대안적 인식론으로 ‘가드네틱스(Gardenetics)’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했다.
‘가드네틱스’는 동아시아의 정원 미학을 현대의 데이터 윤리와 연결하는 개념이다. 서구의 정원이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인위적으로 배치하는 공간이라면, 동양의 정원은 ‘거닐기’와 ‘비움’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 교수는 AI가 만들어내는 비물질적 데이터 가득한 세상을 하나의 ‘가든(Garden)’으로 보고,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비움’의 미학을 통해 실존적 균형을 찾을 수 있는지를 10m 두루마리에 학술적으로 논증해 냈다. (*논문 링크:
https://ora.ox.ac.uk/objects/uuid:844c3fc4-2a47-46c6-a0ff-30fcff172e2d).
애쉬몰린 박물관의 엘리스 킹 중국·한국 미술담당 큐레이터인 셸라 베인커(Shelagh Vainker) 옥스퍼드 교수는 “이진준 박사의 『Empty Garden』을 영구 컬렉션으로 소장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라며 “이 긴 사색적 두루마리는 재료와 기법, 그 안에 담긴 문화적·지적 지식의 폭과 깊이, 그리고 다양한 공간을 제시하는 복합적 구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Empty Garden』은 애쉬몰린 박물관에 소장된 첫 번째 한국 현대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되지 않을 때에도 사전 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진준 교수는 옥스퍼드에서 논문을 집필하던 당시 다리 부상으로 휠체어 생활을 하며 ‘움직임과 멈춤’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밝혔다. 그는 “AI 시대에도 예술은 비물질적 이미지에만 머물 수 없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감각과 경험은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며 “데이터를 넘어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고 사유하는 새로운 감각 체계를 제안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서구 지성사의 대표적 박물관에 보관되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양적 사유가 AI 시대의 새로운 감각 체계를 잇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지속적으로 읽히고 논의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지 두루마리, 비물질적 데이터를 담는 그릇이 되다
논문의 매체로 ‘한지’와 ‘두루마리’를 선택한 것은 고도의 전략적 결과물이다. 1,000년 이상 보존이 가능한 한지는 영구 소장을 원칙으로 하는 박물관의 보존 기준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시각 언어다.
10m 길이의 두루마리는 관람자가 이를 펼쳐가며 읽는 과정 자체를 ‘정원을 거니는 행위’로 치환한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융합된 이 거대한 지도는 관람객에게 선형적인 독서가 아닌, 다감각적인 ‘경계 공간 경험(Liminoid Experience)’을 선사한다. 이는 데이터 기반 시스템과 인간의 지각이 교차하는 지점을 탐구하는 이진준 교수의 ‘데이터 가드니스트’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경영학도에서 옥스퍼드 박사, 예술가로서 첫 KAIST 교수까지… 경계를 허문 융합의 여정
KAIST에서 예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전임교수에 임용된 이진준 교수의 이력은 그가 만든 두루마리만큼이나 입체적이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공중파 PD로 활동하던 그는,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편입하며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이후 영국 왕립예술대학(RCA)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에서 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그는 경영학적 논리, 미디어의 현장성, 그리고 순수 예술의 철학을 끊임없이 융합해 왔다.
현재 옥스퍼드대학교 엑시터 칼리지 방문교수, 뉴욕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예술·기술·인문학의 융합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케이팝 아티스트 지드래곤의 홍채 데이터 기반 우주 예술 프로젝트 〈Good Morning, Mr.G-Dragon〉, 분당중앙공원 AI 기반 미디어 심포니 〈시네 포레스트: 동화〉 등의 작업으로 국내외 예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연구자 이진준 교수.(사진=KAIST)
특히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이자 ‘아트엔테크놀로지센터’ 소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공학적 기술에 인문학적 서사를 입히는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번 애쉬몰린 박물관 소장 소식은 KAIST가 지향하는 ‘문화기술(CT)’의 정점이 예술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학문적 권위 면에서도 세계 최정상급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세계 최고(最古)의 공간에 심어진 한국 현대 예술의 씨앗
애쉬몰린 박물관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 등 인류사의 기념비적인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루브르 박물관보다 110년 먼저 문을 연 이곳에 한국 현대 예술가의 논문이 영구 소장되었다는 것은, 서구 사회가 한국의 현대 예술을 고전적 유물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류의 공적 유산’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될 이진준 교수의 논문은 향후 전 세계 학자들과 예술가들에게 한국의 미학이 첨단 기술 시대에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K-아트의 위상이 제작 기교를 넘어 ‘이론적 깊이’와 ‘인식론적 대안’을 제시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기술의 끝에서 예술의 본질을 묻다
이진준 교수의 《비어있는 정원》이 애쉬몰린 박물관에 소장된 사건은 한국 예술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성취로 기록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성마저 위협한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그는 거꾸로 가장 오래된 매체인 한지 위에 ‘비움’이라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인간의 자리를 재확인시켰다.
KAIST와 옥스퍼드, 그리고 애쉬몰린 박물관을 잇는 이 장엄한 두루마리의 여정은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한 미래 기술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원을 거니는 선비의 마음처럼 우리 삶의 빈자리를 채우고 사유를 확장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진준 교수의 연구는 이제 영국 옥스퍼드 한복판에서 전 세계인에게 그 고요하고도 강력한 질문을 영구히 던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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