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시장으로 이어지는 길 한가운데 닫힌 문이 상징하듯이 ‘마지막 1마일에서 끊긴 창업 이어 달리기’의 부재를 표현한 AI 이미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으로 일하던 시절(2019년 4월~2022년 12월), 나는 연구원들을 만날 때마다 창업하라고 말했다. 인터뷰에서도, 강연에서도, 연구실을 돌며 연구자들을 격려할 때도 같은 말을 했다. 창업 하나가 산업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크고 오래간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존재 이유가 정관에 적힌 대로 ‘국가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연구원이 창업해 성공하는 것만큼 큰 이바지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 데에는 가슴 아픈 숫자가 하나 있다. 우리나라 정부 R&D 과제의 성공률은 99.5%에 이르지만, 사업화 성공률은 20% 수준에 그친다. 실험실에서는 거의 모두 성공했다지만, 시장에서는 다섯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1986년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행정전산망용 주전산기 시스템을 개발하던 때부터 40년 가까이 대덕연구단지에서 지켜본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다. 기술 개발이 국민의 삶에 와닿으려면 연구실에서 시장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1마일’을 누군가 제 발로 걸어가야 한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창업자다.
그 말을 실행에 옮긴 후배들이 있다. 루센트블록도 그중 하나다. ETRI에서 일하던 젊은 연구원들이 원내 기술 창업 인큐베이팅을 거쳐 2018년 대전에서 세운 회사다. 원장으로 재임하던 2021년, 이 회사는 금융위원회로부터 국내 최초의 부동산 토큰증권 플랫폼으로서 혁신금융서비스, 이른바 규제 샌드박스 지정을 받았다. 출연연에서 나고 자란 기술 창업 기업이 가장 보수적인 규제 산업인 금융 분야에서 새로운 시장을 연 것은 대덕 50년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이후 이 회사는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를 운영하며 4년 넘게 금융사고 한 건 없이 50만 명의 이용자를 모았고, 300억 원 규모의 증권을 발행·유통했다.
이 회사를 두고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창업 초기에 만난 젊은 창업자들에게 나는 회사가 잘되더라도 그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성과가 아니므로 지역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회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나가는 말로 건넨 덕담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들은 그 내용을 회사 정관의 조항으로 명시해 두었다. 회사의 이익을 사회 공헌에 사용할 수 있다고 스스로 못 박은 것이다. 기특했다. 출연연 정관의 ‘이바지’라는 말이 한 스타트업의 정관으로 옮겨 가는 것을 보며, 나는 기술보다 귀한 가치가 전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6년 2월 금융위의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심사에서 이 회사는 탈락했다. 기술이 있다는 회사가 왜 떨어졌느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40여 년간 연구 현장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기술은 만들기가 어렵지만 모방은 쉽다는 사실이다. 없던 시장을 열기까지 겪은 시행착오와 축적한 노하우는 심사 서류 몇 장으로 온전히 보여주기 어렵다. 개척자가 여러 해에 걸쳐 낸 길도 일단 길이 나고 나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처럼 보인다. 먼저 만든 기술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채 따라잡히고, 정작 평가 과정에서는 개척의 가치가 제대로 매겨지지 않는 안타까운 사례를 나는 창업 현장에서 수없이 보았다.
탈락은 심사의 일부이니 결과를 따질 생각은 없다. 기술 개발자의 눈에 걸리는 것은 ‘심사’가 아니라 ‘설계’다. 탈락한 기업이 다시 신청할 창구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한쪽에서 출연연을 통해 기술을 만들고, 연구원의 등을 떠밀어 창업하게 하고, 샌드박스라는 제도로 4년간 실증까지 하게 했다. 그런데 그 실증이 성공해 제도가 만들어지는 순간, 다른 한쪽에서 재도전의 회로를 끊어버린다면 국가 R&D 투자의 선순환은 마지막 고리에서 멈춘다. 이것은 설계 결함이다. 창업하라고 등을 떠민 국가가 창업한 사람 앞에서 문을 닫은 셈이다.
지금도 대덕의 연구실에는 자신의 기술로 세상에 이바지하겠다는 꿈을 품고 창업을 준비하는 연구원들이 있다. 그들이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다. 기술이 시장에서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은 창업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고 가야 할 몫이다. 그러나 국가가 마련한 제도의 문이 마지막 관문에서 닫히는 위험까지 개인에게 짊어지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광경을 지켜본 대덕의 연구원들에게 내가 예전처럼 창업하라는 말을 선뜻 꺼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국회도 이 결함을 발견했다. 2026년 7월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병덕 더불어 민주당 의원은 루센트블록이 추가로 예비인가를 신청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금융위원회에 건의했다. 8월은 예비인가를 받은 두 컨소시엄이 본인가를 신청하는 달이다. 지금이 이 결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시점인 셈이다.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신청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이다. 문을 연다고 결과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심사는 심사대로 하면 된다. 다만 국가가 만들고 키우고 검증까지 마친 기술이라면 경쟁의 출발선에는 한 번 세워줘야 한다.
나는 지금도 후배 연구원들에게 계속 창업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 말이 빈말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은 이제 공정한 국가 제도의 몫이다.
김명준 전 ETRI 원장.
He is...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졸업, KAIST 전자계산학 석사, 프랑스 낭시 제1대학교 전자계산학 박사
-전 ETRI 기획본부장, 창의연구본부장, 소프트웨어·콘텐츠연구소장, 원장
-전 정보통신산업진흥원 부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장
-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한국정보과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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