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익 큐네스티(구 한국사회투자) 이사장 [출처=큐네스티]
우리나라 스타트업 투자시장을 얘기할 때 모태펀드를 빼놓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국내 스타트업 투자가 모두 모태펀드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것 역시 정확한 말은 아니다. 자본시장에는 민간 벤처펀드가 있고,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이 있으며, 금융기관 자금과 전략적 투자자, 중앙부처와 지자체 출자 펀드, 글로벌 자본도 함께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태펀드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벤처투자시장의 위험을 분담하고, 민간자금을 유인하며, 미래 산업과 성장 각 단계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는 핵심 축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6년 1차 정시 출자에서도 창업초기, 스케일업, 유니콘 등 기업 성장단계별 출자계획이 발표되었다. 또한 청년, 여성, 임팩트, 가업승계M&A, 지역, 오픈이노베이션 등 목적형 출자계획도 포함되었다. 이는 모태펀드가 벤처투자를 촉진하는 과정에서 자본시장 전반을 아우르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차 정시 출자의 경우 1.6조원을 출자해 3.6조원 규모의 펀드 결성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투자 확대를 위한 촉매자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스타트업이 여기서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단순히 “모태펀드 규모가 크고 다양하다”는 것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것은 모태펀드가 출자하는 펀드에서는 투자 판단의 기준이 더 구조화되고, 자금의 목적 또한 더욱 분명해진다는 데 있다. 많은 대표들이 투자 유치를 준비하며 “좋은 투자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투자환경에서는 유명 투자사의 간판만으로 투자가 진행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투자사가 어떤 투자조합을 운영하고 있는지, 출자 배경이 무엇인지, 어떤 투자 의무와 기간을 갖고 있는지, 어느 섹터 및 성장 단계에 투자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AI기업이라도 어떤 AI 펀드에는 적합할 수 있지만, 어떤 AI 펀드에는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회사가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투자사 심사역 개인이 아니라, 명확한 주목적과 투자대상이 정의된 펀드이다. 그래서 투자사 입장에서는 좋은 스타트업이 꼭 투자가능한 스타트업은 아닐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스타트업의 접근 방식이 한계를 드러낸다. 어떤 기업은 시장성을 더 강조하고, 어떤 기업은 기술성을 더 부각시킨다. 그러나 운용사의 입장에서는 주목적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된다. 예를 들어 초기 기후테크분야 지역펀드에서 투자를 받고자 함을 가정해보자. 회사는 운영사에 어떻게 어필해야 할까? 우선 기후테크와 연관된 솔루션, 기술, 사업모델, 시장등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지역 내 본사 등이 위치하고 설립 초기기업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모태펀드는 보통 8~10년 정도의 운영기간을 가진다. 이는 대체로 4년 투자 후 4년 회수하는 구조로 운영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투자를 유치하고자 하는 기업은 회수 시점 이전에 매력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세컨더리 펀드나 스케일업 투자사에 잘 팔릴 수 있어야 한다. 막연히 크게 성장하겠다는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지표(KPI)로 성장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고, 고객과 시장 또한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2020년 서울대기술지주와 카카오벤처스를 중심으로 시드투자를 받은 이후, 추정 기업가치 3.5조원으로 성장한 리벨리온은 대표적 성공사례이다. 시드투자 이후 시리즈 A부터 C까지를 거치며 모태펀드 기반 투자가 이루어졌고, 이후에는 글로벌 전략투자자와 대형 금융자본의 참여까지 이끌어냈다. 올 해 초에는 국민성장펀드로부터 Pre-IPO 단계 투자도 완료되었다. 이처럼 모태펀드는 한 번 자금을 넣고 역할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성장 가능성 높은 기업의 후속 투자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한다. 이 사례는 정책적 육성 섹터 내 시장성까지 갖춘 기업이 모태펀드 투자 유치에 유리함을 보여준다.
투자자들은 투자 목적에 매우 민감하다. 대형VC는 산업과 시장지배력을 더 중시한다. CVC는 자사 사업과의 전략적 시너지를 최우선적으로 평가한다. 지자체 출자 펀드는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증대 등 지역가치 증대에 높은 점수를 준다. 반면 모태펀드는 자금 공급이 부족한 성장 단계에 자본을 흘려보내거나, 민간이 상대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초기 단계와 전략산업을 뒷받침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모태펀드로 부터 투자유치를 위해 스타트업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첫째, 투자사를 브랜드가 아니라 펀드 구조로 읽어야 한다.
많은 대표가 여전히 “유명한 VC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투자 판단은 운용 펀드의 주 목적과 운용 구조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모태운용사라도 어떤 펀드는 초기기업을, 어떤 펀드는 성장단계를, 또는 지역이나 섹터를 중심으로 투자된다. 따라서 창업자가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이 투자사가 유명한가?” 라기 보다는 “이 투자사의 자금은 어떤 자금인가?”에 가깝다. 투자금 원천에 대한 확인이 없으면 회사와 맞지 않는 엉뚱한 자본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투자 유치를 잘하려면 투자자를 많이 만나는 것도 필요하지만 회사와 맞는 펀드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모태펀드 운용사를 만날 때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정책 키워드를 앞세운다. 그러나 투자자는 키워드보다 사업 구조를 본다. “우리도 AI다”, “우리도 지역기업이다”, “우리도 로보틱스 기업이다”라는 식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어떤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고, 그것이 어떤 고객과 어떤 매출, 어떤 KPI로 이어지는지 논리를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 즉 정책 적합성은 사업 구조와 연결되어야 한다.
둘째, 회사를 ‘좋은 기업’이 아니라 ‘투자 가능한 기업’으로 설득시켜야 한다.
창업자는 기술과 솔루션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만, 투자자는 그것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자금 투입이후 12~24개월 사이에 무엇이 달라지는지, 어떤 KPI가 개선되는지, 다음 라운드를 진행할 수 있는 논리가 무엇인지,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한 대안과 리스크 대응은 무엇인지 같은 요소들을 꼼꼼이 본다. 특히 모태운용사에는 “주목적 만족”과 함께 “높은 수익률”이라는 논리가 동시에 제시됨이 좋다. 뛰어난 상품, 차별화된 기술을 기업의 언어로 말한다고 설득되지 않는다. 투자자가 쓰는 언어로 말할 때 비로소 투심은 움직인다.
셋째, 라운드와 밸류에이션에 대한 논리가 명확해야 한다.
투자자가 최초로 투자한 시드 라운드는 명확하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라운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투자자가 기대하는 수준이 완전히 달라진다. 시드에서 바로 시리즈A로 갈 수도 있고, 시드를 여러 개로 나눌 수도 있으며, Pre-A 또는 브릿지로 라운드를 정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스타트업이 스스로의 단계를 오판한다. 단순이 투자 밸류만으로 라운드를 구분하기도 하고, 라운드에 맞지 않는 밸류를 제시해 스스로 투자 매력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검증되지 않은 사업모델에 과도한 밸류를 부여하거나, 반대로 충분한 성과를 냈음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인 밸류제시로 기업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투자자가 숫자만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숫자 뒤에 자리잡은 논리를 중시한다. 투자단계에 대한 인식이 모호한 대표는 자본시장에서 신뢰를 얻기 어렵다. 투자자는 동 라운드에서 여러 경쟁기업을 동시에 비교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라운드와 밸류에 대한 논리가 명확치 않으면 협상력도 낮아진다.
넷째, 거버넌스를 미리 정리해 투자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
투자 유치 과정에서 대표들은 제품, 기술, 고객 이야기만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투자자는 공동창업자 간 역할 정립이라던 지, 기존 주주와 책임 문제가 없는 지, 스톡옵션이 예정되어 있는지, 핵심 IP가 법인에 귀속돼 있는지, 특수관계자 거래 문제 등을 우선적으로 확인한다. 기술과 시장은 시간이 흐르며 계속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책임 문제는 후속투자 전체를 가로막는 차단막이 되기 쉽다.
특히 모태펀드 기반의 자금일수록 이런 기본 사항에 더 민감하다. 운용사는 정책성과 수익성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초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문제가 결국 기업이 실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운용사는 정책 방향뿐 아니라 회수 가능성과 후속투자 가능성을 매우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 유치는 성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섯째, 투자이후 다음 라운드 투자와 연계되는 브릿지를 설계해야 한다.
스타트업이 쉽게 빠지는 함정은 이번 라운드만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투자자는 투자금이 다음 투자를 불러올 수 있을지를 최우선적으로 본다. 투자금으로 어떤 검증을 마치고, 어떤 고객을 확보하며, 마일스톤을 달성할 지, 어떤 KPI를 통해 다음 라운드 밸류를 높일 수 있을지가 논리적으로 명확히 제시되어야 한다. 리벨리온 사례가 보여주듯 투자를 통해 제품 생산과 고객 확보로 명확히 이어질 수 있는 논리 구조가 있어야 한다. 성공적인 투자 유치는 단순한 자금 조달이 아니라, 다음 투자를 연결하는 안전한 다리를 놓는 일이다. 투자자는 좋은 기업 보다는 잘 팔릴 기업에 돈을 넣는다.
최근 딥테크 투자 흐름도 이러한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 중기부 발표에 따르면 2024년 국내 딥테크 10대 분야 벤처투자 금액은 3.6조 원으로 전년 대비 34% 증가했고, 그 중 AI 분야는 1조 원으로 75% 늘어나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동시에 피투자기업 중 75%가 모태자펀드 투자 및 지원사업 수혜를 받은 것으로 발표됐다. 이는 우리나라 딥테크기업 상당수가 정책자금과 민간자금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업자는 어느 한쪽만 이해해서는 부족하다. 시장의 논리와 정책의 논리를 함께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투자는 자금을 유치하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자본과 함께 성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대표는 “얼마를 받을까?”보다 “이 투자자가 어떤 도움이 될까?”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모태펀드 시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한국 스타트업 자본시장에서 어떤 논리로 위험이 분산되고, 어떤 방식으로 기업이 선별되며, 후속투자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시야가 있어야 비로소 다양한 투자 펀드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모태펀드는 앞으로도 한국 벤처투자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에 맞추어 민간펀드도, 지자체펀드도, 전략적 투자펀드도 계속 커질 것이다. 모태펀드 시장을 잘 이해하는 창업자는 한국 투자시장의 작동 방식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만큼 더 나은 투자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는 결국 운의 문제가 아니라 준비의 문제다. 그리고 그 준비는 사업계획서 작성 이전에 먼저, 자본의 구조를 잘 파악하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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