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모두를 'AI 대표주'로 묶어 부르지만, 밸류체인 내 역할과 수익 구조는 철저히 다르다. 본 시리즈는 2026년 한국 AI 산업의 실제 지형을 하드웨어·모델·플랫폼·서비스 4개 층위로 나눠본다. 국내 기업들이 어느 단계에 몰려 있고 어느 곳이 비어 있는지 그 구조적 현실을 차분히 짚어본다.<편집자 주>
한국 AI산업 밸류체인 기업 단층도 (자료=제미나이)
[한국정경신문=임윤희 기자] 국내 주식시장과 산업계에 ‘AI 대표주’ 간판을 단 기업이 넘쳐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네이버·카카오·SK텔레콤·LG 계열사 등이 한 줄로 묶여 AI 기대주로 거론된다. 이들이 서 있는 위치와 감당하는 리스크는 전혀 다르다. 수조원을 들여 데이터센터와 칩 인프라를 조성하는 기업과 해외 빅테크의 모델을 빌려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을 같은 잣대로 보기 어렵다. 시장에선 “AI 밸류체인에서 어디에 서 있느냐를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국내 AI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하단에는 GPU·AI 서버·데이터센터 같은 하드웨어(인프라) 층이 있다. 그 위에는 초거대 언어모델과 멀티모달 모델을 개발하는 모델 층이 자리한다. 세 번째는 이 모델들을 기업 IT 시스템과 업무 프로세스에 연결해 주는 플랫폼 층이다. 맨 위에는 의료·제조·금융·공공 등에서 실제로 쓰이는 서비스 층이 올라간다.
칩부터 현장 앱까지.. 韓 AI 산업 4계층 해부
하드웨어 층은 돈과 설비가 집중되는 인프라 선점 구간이다. 메모리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앞세워 글로벌 AI 서버 수요를 노린다. 연산의 심장인 AI 반도체(NPU) 쪽에선 리벨리온(사피온 합병), 퓨리오사AI, 딥엑스 같은 국내 팹리스가 서버·엣지용 칩을 실제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인프라 영역에서는 정부 움직임도 빨라졌다. 정부는 2026년까지 5만 개 이상의 GPU를 확보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국가 AI 컴퓨팅 센터 구축에 나섰다. SK텔레콤·KT·LG유플러스와 NHN클라우드는 이 GPU와 서버 인프라를 묶어 AI 전용 데이터센터(AIDC)를 늘리며 국가 단위 클라우드·AI 인프라 사업을 함께 노리고 있다.
모델 층은 AI의 두뇌를 만드는 구간이다.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X’, LG는 ‘엑사원’을 앞세워 국산 초거대 언어모델을 개발해 왔다. 통신·게임·스타트업들도 각자 LLM을 내세우며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의 수천억 파라미터급 범용 모델과 맞붙기에는 연산 비용·데이터·인재 측면에서 격차가 아직 크다는 평가가 많다. 국내 기업들은 범용 초거대 모델 한판 승부보다는 개별 기업·산업 데이터를 학습한 소형 언어모델(sLLM)에 무게를 두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플랫폼 층은 지금 가장 빠르게 매출이 잡히는 구간이다. 삼성SDS, SK C&C, LG CNS, 메가존클라우드 등 IT 서비스·클라우드 기업들은 여러 모델을 한데 묶은 멀티 LLM 플랫폼을 앞세운다.
고객사는 오픈AI·구글·앤트로픽·네이버·LG 등 다양한 모델을 업무별로 골라 쓰고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내는 구조다. 실제 기업용 생성형 AI 프로젝트 상당수는 이 플랫폼 레이어에서 수익화로 이어진다. 국내 기업들에겐 안정적인 B2B 구독·사용료 수익원이 되는 구간이다.
의료 영상과 병리 데이터를 분석해 암 진단을 돕는 의료 AI 기업 루닛·뷰노가 대표적이다. 공장 설비 데이터를 학습해 공정 최적화·예지보전을 하는 산업 AI 기업 마키나락스도 이 층에 있다.
여기에 업무 자동화·개인 비서형 서비스를 앞세운 여러 스타트업까지 더해지면서 서비스 층에서는 국내 플레이어 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제조·금융·유통·공공 현장에서도 AI 활용은 빠르게 늘고 있다. 문서 요약·질의응답, 콜센터 상담, 품질 검사·예지보전, 추천 시스템 같은 업무에 AI가 들어가는 식이다.
국내 AI+X 어워드나 ‘AI 톱100’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기업 다수도 이런 서비스 층에 몰려 있다. 다만 글로벌 모델을 그대로 붙이고 화면만 바꾼 ‘래퍼(wrapper)’형 서비스는 경쟁이 치열한 데 비해 수익성을 지키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국내 AI 생태계 현주소 (자료=제이나이)
상단은 '레드오션', 하단은 '해외 종속'..수익 구조의 한계
국내 AI 산업의 문제는 네 층이 고르게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입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서비스와 경량 모델 상단에는 국내 플레이어가 몰려 레드오션이 됐다.
반면 범용 초거대 모델과 GPU 설계·제조 같은 핵심 구간은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다. 국내 기업이 B2B AI 서비스로 매출을 올려도 원가의 상당 부분이 해외 LLM·클라우드 사용료와 GPU 인프라 비용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시장에선 이를 두고 “AI 사용 강국이지만 아직은 AI로 돈 버는 나라는 아니다”라는 냉정한 평가도 나온다.
해외에서는 밸류체인별 역할이 점점 더 분리되는 추세다. 빅테크는 GPU·데이터센터 같은 인프라와 파운데이션 모델에 자본을 집중하고 그 위에 수많은 플랫폼·서비스 기업이 올라타는 구조다.
미국·중국 모두 인프라와 모델에서 ‘기술 주권’을 확보한 뒤 산업별 응용은 민간·스타트업 생태계에 넓게 개방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키우는 중이다.
한 업계 전문가는 "인프라와 모델은 글로벌 기술과 협력하고 플랫폼과 서비스는 국내 산업 데이터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네 단계를 모두 장악하겠다는 허상을 버리고 '경쟁할 칸'과 '협력할 칸'을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국형 AI가 생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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