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확산과 미국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가 맞물리며 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이 슈퍼사이클에 진입했다. 효성중공업이 HVDC(초고압직류송전) 기술을 앞세워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LS일렉트릭과 HD현대일렉트릭도 차별화된 기술로 추격에 나서고 있다.
생성형 AI로 생성한 이미지. 사진=나노바나나
AI 데이터센터發 전력수요 폭증…전력기기 '슈퍼사이클' 진입
AI 데이터센터 증설로 전력기기 수요는 공급을 웃도는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4년 약 415TWh(테라와트시)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이는 일본 전체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수준이다.
특히 미국은 AI 인프라 확장 영향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데이터센터가 향후 미국 전력 수요 증가분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송전·변전 설비 확충이 필수 과제로 떠올랐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2026년 미국 내 신규 전력 설비 증설 규모를 사상 최대인 86GW(기가와트)로 내다봤다.
문제는 공급이다. AI 데이터센터 구축 속도를 전력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변압기, 스위치기어, GIS(가스절연개폐장치) 등 핵심 전력기기의 공급 부족이 심화되고 있다.
맥킨지는 "변압기 같은 핵심 전력장비의 리드타임이 2~5년까지 길어질 수 있다"고 짚었다. 블룸버그도 "최근 미국 AI 데이터센터 붐이 변압기·스위치기어 부족에 부딪히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 노후 전력망 교체 수요까지 더해지며 시장은 구조적 성장 국면에 들어섰다. 미국 송전망의 약 70%는 설치된 지 25년이 넘은 노후 설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미국 유틸리티 기업들은 AI 대응과 전력망 현대화를 위해 향후 5년간 1조4000억달러(약 1900조원) 규모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국내 전력기기 3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확대하고 있다. 북미를 중심으로 초고압 변압기, 배전반, HVDC 등 고부가 제품 수주를 늘리며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업계에선 한국 기업들이 품질과 납기 경쟁력을 기반으로 기존 유럽·미국 업체 중심 시장에서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효성중공업 창원공장 전경. 사진-효성
효성重, HVDC 풀밸류체인으로 초고압 시장 선점
효성중공업은 전력기기 슈퍼사이클의 최대 수혜 기업으로 꼽힌다. K전력기기 3사 중 가장 먼저 HVDC 기술 국산화에 성공하며 시장을 선점했다.
HVDC는 발전소에서 생산된 교류(AC) 전력을 직류(DC)로 변환해 송전한 뒤 다시 교류로 변환해 공급하는 기술이다. 장거리 대용량 전력 송전의 안정성이 높아 '전력 고속도로' 구현의 핵심 기술로 평가된다.
효성중공업이 주력하는 전압형 HVDC는 전류형에 비해 전력 전송 방향 전환이 자유롭고 무효전력 제어가 가능해 신재생에너지 계통 연계의 필수적인 기술로도 꼽힌다.
변압기, 차단기, 전력변환장치까지 아우르는 'HVDC 풀 밸류체인'을 구축하며 경쟁사 대비 높은 진입장벽을 확보했다. 특히 북미 시장에서 초고압 제품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며 고부가 수익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현재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기술인 양주 200MW(메가와트) BTB(Back-to-Back) 전압형 HVDC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서 올해 정부의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프로젝트와 연계해 2027년까지 2GW급 대용량 HVDC 시스템 개발을 완료하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하며 기술 격차를 확대하고 있다.
수주 측면에서도 미국과 중동을 중심으로 대형 초고압 프로젝트를 연이어 따내며 수주잔고를 빠르게 늘리고 있다. 미국 멤피스 초고압 변압기 공장은 2026년 말까지 2배 증설하고 창원공장 내 HVDC 전용 공장을 신축해 연산 6000억원 규모의 추가 생산 능력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UL인증 데이터센터향 배전반 제품. 사진=LS일렉트릭
LS일렉, 배전반으로 북미 데이터센터 정조준
LS일렉트릭은 AI 데이터센터 수요 확대에 힘 입어 배전반 기술 경쟁력으로 직접적인 수혜를 입고 있다.
초고압 변압기가 전력망의 ‘심장’ 역할이라면 배전반은 전력을 세밀하게 분배하고 제어하는 ‘혈관’ 역할을 한다. 데이터센터는 전력 공급 안정성과 빠른 구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납기 경쟁력이 중요하다.
LS일랙트릭은 북미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전용 '스마트 배전 솔루션'을 앞세워 빅테크 기업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디지털 트윈 기술을 적용해 전력 부하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사고를 사전에 예방하는 이 솔루션은 고도의 신뢰성이 요구되는 데이터센터 환경에 최적화돼 있다.
최근 북미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프로젝트를 잇따라 수주하며 글로벌 빅테크 공급망에 진입했다. 지난 13일엔 약 1703억원 규모의 북미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배전 설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올해 들어 북미 데이터센터 관련 누적 수주액만 1조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대신증권은 "LS일렉트릭이 2020~2025년 미국에서 100개 이상의 전력 인프라 프로젝트를 수행, 2025년부터 의미 있는 미국향 AI 데이터센터 수주가 시작됐다"며 "2026년 본격 성장 구간에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제품 측면에서는 회사가 중저압 스위치기어와 GIS를 폭넓게 공급하고 있고 배전반 및 배전기기의 빠른 납기와 사후 서비스 대응력이 강점으로 제시된다.
LS일렉트릭은 텍사스와 유타의 현지 생산 거점을 기반으로 물류 비용을 절감하고 고객사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현지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초고압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았던 배전 시장을 스마트화·고부가가치화함으로써 독자적인 시장 영역을 구축했다는 평가다.
HD현대일렉트릭이 제작한 국내 최대 용량 친환경 절연유 적용 변압기. 사진=HD현대일렉트릭
친환경 변압기 앞세운 HD현대일렉…글로벌 규제 대응 나선다
HD현대일렉트릭은 기존 초고압 변압기에 더해 글로벌 탄소중립 흐름에 대응하기 위한 친환경 전력기기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SF6(육불화황)를 대체하는 친환경 GIS와 친환경 절연유 변압기 등 저탄소 제품군을 확대하며 글로벌 규제 대응에 나선 점이 특징이다.
최근에는 국내 최대 용량인 400kV 460MVA(메가암페어)급 친환경 절연유 적용 변압기 제작에 성공했다. 기존 광유 대신 식물성 절연유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식물성 절연유는 생분해성이 높아 환경 오염 위험이 적고 인화점이 광유보다 훨씬 높아 화재 위험을 획기적으로 낮춘다. 데이터센터나 환경 규제가 까다로운 유럽 시장에서 강점을 발휘할 전망이다.
해당 제품으로 최근 영국 최대 전력망 사업자인 내셔널그리드와 1404억원 규모의 공급 계약을 체결하면서 유럽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미 시장 대응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약 2억달러(약 29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앨라바마 공장을 증설하고 현지 초고압 변압기 생산능력을 50% 늘려 765kV(킬로볼트)급 제조 역량까지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역대급' 수주잔고, 호황기 최소 2~3년 지속 전망
한편 증권가에서는 전력기기 3사가 통상 1분기가 계절적 비수기임에도 업황 호조가 이어지면서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증권가 컨센서스에 따르면 효성중공업은 매출 1조4058억원, 영업이익 1694억원으로 전년 대비 약 65%의 가파른 이익 성장이 점쳐진다. LS일렉트릭은 북미 배전반 수출 호조에 힘입어 영업이익 1341억원 수준으로 전년 대비 50% 이상 급증할 전망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매출 1조613억원, 영업이익 2679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20% 이상의 영업이익 성장이 기대된다.
수주잔고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15조원 후반대, LS일렉트릭은 5조원 안팎, HD현대일렉트릭은 약 9조원 이상의 일감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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