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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에 ‘시골 노인’ 역할로 대종상…거장들이 최불암만 찾은 이유

국민배우 최불암이 29일 향년 86세로 작고했다. 그의 연기 인생 발화점이 영화 제작자인 아버지 최철이다. 1940년대 인천에서 영화제작사·언론사를 운영하며 영화 ‘무형의 악마’ ‘여명’ 등을 만들었다. 향년 35세에 과로로 요절했다.

국민배우 최불암이 29일 향년 86세로 작고했다. 그의 연기 인생 발화점이 영화 제작자인 아버지 최철이다. 1940년대 인천에서 영화제작사·언론사를 운영하며 영화 ‘무형의 악마’ ‘여명’ 등을 만들었다. 향년 35세에 과로로 요절했다.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유고작 ‘수우’(1948) 시사회에 참석했던 초등학교 2학년생 최영한(최불암 본명)은 당대 문인예술가의 아지트였던, 어머니 이명숙 여사의 명동 선술집 ‘은성’에서 문화적 세례 속에 자라났다. [중앙포토]

지난 29일 작고한 대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 장수 드라마 ‘수사반장’ ‘전원일기’ 속 간판 탤런트로 대중에 각인됐지만, 충무로 영화에 빼놓을 수 없는 성격파 배우였다.

충무로 거장의 믿고 쓰는 배우 #대역 성우 없던 연기파 최불암 #검열에 50분 잘리기도 #1960~80년대 시대 자화상 그려

국립극장 연극 ‘햄릿’에 주연 데뷔한 1959년, 최불암은 민경식 감독의 복수극 ‘내일없는 그날’의 단역으로 스크린에도 데뷔했다. 부장검사 역할로 출연한 유고작 ‘잠복근무’(2005)까지, 출연 영화가 80편이 넘는다(한국영상자료원 기준, 내레이션 참여작 제외).

최불암은 특히 1960~80년대 거장 감독들의 수작을 깊이 있는 연기로 떠받친 숨은 대들보였다. 신상옥의 ‘만종’(1969), 김기영의 ‘파계’(1974), 임권택의 ‘왕십리’(1976) ‘길소뜸’(1985), 유현목의 ‘문’(1977) ‘사람의 아들’(1980),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이두용의 ‘최후의 증인’(1980) 등이다.

임권택 감독의 '왕십리'(1976)는 경제개발계획이 발표된 시기 왕십리를 떠나 유신헌법 독재가 한창이던 시기 고향에 돌아온 준태(신성일)의 지난 14년을 당구장 아저씨(최불암, 사진)와의 만남을 통해 들춰낸다. 이 당시 최불암이 36세. 배우 신성일이 불과 3살 어렸지만, 여러 편의 영화에서 청년세대와 아버지 세대 역할로 호흡을 맞췄다. 사진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캡처

엄혹한 군부독재 시대 한국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 거장들의 대표작에서 최불암은 “젊은 세대의 조력자이자, 한국 현대사의 상처 입은 어른의 얼굴”(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학예연구팀장)을 묵묵히 그려냈다. 1세대 영화평론가 김종원씨는 “최불암은 무대에서 쌓은 오랜 연기 경력이 영화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후시녹음이 주를 이룬 1960년대에 최불암처럼 음성연기까지 소화한 배우는 드물다”면서 “대역 성우가 목소리 연기를 받쳐준 미남 배우들과는 달랐다. 타고난 성량과 마스크의 배우”라 평가했다.

‘세종대왕’ 황희로 첫 대종상 수상

배우 최불암(왼쪽)이 18회 대종상 영화제(1979)에서 영화 '달려라 만석아'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른쪽은 당시 여우주연상(영화 '심봤다')을 수상한 배우 유지인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첫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사극 ‘세종대왕’(1978, 감독 최인현)에서 최불암은 세종(신성일)의 즉위부터 한글 반포까지 임금의 곁을 지킨 황희 역할을 무게감 있게 소화했다. 이듬해 김수용 감독의 아동 영화 ‘달려라 만석아’에선 당시 39세였던 최불암이 시골을 지키는 강직한 노인 연기로 울림을 주며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거장들은 30대 최불암에게 대가의 역할을 앞다퉈 맡겼다. 고은의 1973년 소설을 김기영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파계’에선 열반을 앞둔 고승이 되어 후계자들을 냉혹한 시험에 몰아넣었다. 유현목 감독의 ‘문’에선 당시 37세 동갑 배우 박근형과 일본 전통 악기 아악 거장 세이준(박근형), 한라산 백록담에 은거하는 가야금 천재 우단 선생(최불암) 역할로 “내면의 번뇌를 표현하는 대담한 연기 대결”(이화정 영화저널리스트)을 펼쳤다. 이어 유 감독의 ‘사람의 아들’에선 현대 사회의 뿌리 깊은 비극을 파헤치는 형사가 됐다.

검열로 50분 삭제…“현대사의 상처 입은 어른"

1980년 개봉 당시 50분 가까이 검열로 삭제된 채 공개됐던 영화 '최후의 증인'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삭제된 50분 가까운 분량을 복원하며 새롭게 조명받았다. 영화에서 최불암(오른쪽)은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살인죄를 쓴 황바우를 연기했다.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검열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 대표작에 꼽히는 이두용 감독의 영화 ‘최후의 증인’은 신군부 치하에 158분의 원본 중 50분 가까이 잘려나간 채 개봉했다. 영화에서 최불암이 연기한 황바우는 한국전쟁 당시 살인누명으로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인물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죄 없는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서다.

“선량하기에 이용당해왔고 (중략) 결코 악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김성종 원작 소설 『최후의 증인』중), 바로 황바우에게 최불암은 더없이 인간적인 얼굴을 새겨냈다. 대체 불가한 연기였다. 1987년 동명 MBC 드라마에서도 황바우 역을 그가 맡았다. 영화 ‘최후의 증인’은 2005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삭제 부분을 복원했고, 박찬욱·오승욱 등 영화감독과 평단의 열렬한 지지 속에 2017년 4K 디지털 복원판이 베를린영화제에서 공개되며 새롭게 주목받았다.

사생아·본처 아들 비극 씨앗 된 비정한 아버지

영화에서 최불암(가운데)은 가족적인 가부장뿐 아니라, 비정한 유사 아버지의 모습도 연기했다. 사진은 최불암 주연의 영화 '졸업생' 한 장면. [중앙포토]

영화 속 ‘아버지’ 최불암은 드라마와 닮고도 달랐다. 김기 감독의 영화 ‘졸업생’(1976)에선 중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되어, 중학교 3학년생인 아들이 아픈 어머니의 약값을 벌려고 신문팔이를 하다 사고를 당하자, 온 가족이 뭉쳐 시련을 헤쳐나가는 여정을 그리기도 했다.

이장호 감독 영화에선 두 편 내리 비정한 (유사)아버지가 됐다. ‘어제 내린 비’(1974)에서 최불암은 결혼 전 낳은 사생아(김희라)와 본처와 얻은 적자(이영호), 두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갈등하는 파국의 씨앗이 됐다. 배우 안성기 변두리 청년을 연기한 ‘바람불어 좋은 날’에선 부동산 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김회장을 연기했다. “남들이 뭐라 손가락질하는지 안다. 배추장사 하던 무지렁이가 악랄한 수단을 써서 졸부가 됐다고….” 한 변두리 청년의 분노를 사는 그의 이 독백 연기는 얄팍한 악역과 달랐다. 당시 조감독 배창호 감독은 “최불암 선생의 독백은 장중한 음악을 듣는 듯 울림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국민배우 최불암(왼쪽부터), 안성기씨.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에서 살기가 막막한 변두리 청년과 졸부 노인으로 호흡 맞춘 두 배우는 이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에선 술 취해 짝사랑에 힘겨워하는 아들과 그 아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친구 같은 아버지 역할로 다시 만났다. 사진은 2016년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전국후원회장으로 활동해온 최불암과 유니세프 친선대사 안성기가 생전 만난 모습이다. [중앙포토]

훗날 배 감독 자신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에서 친아버지를 모델로 한 주인공(안성기)의 아버지 역에 최불암을 캐스팅했다. ‘전원일기’ 속 그가 인자하되 권위 있는 아버지라면, 이 영화에선 술 취해 들어온 아들과 연애 상담을 해주는 친구처럼 자상한 아버지다.

배창호 “김승호·신영균 계보 잇는 영화사 명배우”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배 감독은 “최불암 선생은 한국영화 역사에서 김승호(1918~1968), 신영균 등 계보를 잇는 굵직한 명배우고, 보석 같은 대배우였다”고 추모했다. 이장호 감독은 “불암 형은 다정한 사람이었고 악역도 개성 있게 소화했다. 목소리가 독특해 동시녹음 때 빛이 나는 배우였다. 무엇보다 연기력이 좋았다”면서 “진짜 아까운 배우”라 상실감을 표했다.

안방극장의 친근한 스타이자, 거장 감독들의 믿고 의지하는 배우였던 최불암. “그렇게 멋진 남자는 난 처음 봤다.” 배우 박근형의 이런 감탄(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은 생전 그와 함께한 동료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최불암, 영화가 기억하는 배우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가 ‘최불암, 영화가 기억하는 배우’ 추모 섹션을 30일부터 열고 있다. 사진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캡처

최불암 대표 영화들을 온라인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가 ‘최불암, 영화가 기억하는 배우’ 추모 섹션을 30일부터 열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왕십리’ ‘길소뜸’(1985)을 비롯해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1974) ‘기쁜 우리 젊은 날’,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를 무료로 볼 수 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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