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엽 신작, SPAF 협력예술가 작품으로 선보여
모래 그리고 지우며 낯선 관객과 ‘연결’ 경험
“놀이와 명상이 공존하는 공연 만들고 싶었다”
아비뇽 호평 ‘물질’ 이어 관객 참여 실험 확장
이진엽 연출의 신작 <찰나의 찰나>의 공연 이미지. (C)Kristine Zipfel
연출가 이진엽.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낯선 사람들이 모래로 뒤덮인 무대 위에 선다. 누군가는 빗자루를 들고 선을 긋고,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모래를 헤집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이내 다른 사람의 흔적과 뒤섞이며 사라지고 다시 생겨난다.
2026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협력예술가 신작으로 관객을 만나는 <찰나의 찰나>의 한 장면이다. <물질>, <잠자리 연대기> 등 독특한 방식의 관객 참여형 공연을 만들어 온 연출가 이진엽이 관객들이 직접 모래에 그림을 그리며 교감하는 실험적 무대를 선보인다.
모래에 그림이라니, 빛과 모래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샌드아트가 연상되기도, 어렸을 적 친구들과 두꺼비집을 짓던 학교 운동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지난 22일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이진엽 연출은 “관객들이 목적성 없이 순간에 집중하며 머릿속을 비우는, 놀이와 명상이 공존하는 공연”이라고 소개했다.
이진엽 연출의 신작 <찰나의 찰나>의 공연 이미지. (C)Kristine Zipfel
공연 이름인 <찰나의 찰나>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모래의 유한성과 현재성에서 착안한 것이다. 이 연출은 지난 2020년, 검은 돌 위에 모래로 그림을 그리던 덴마크 시각예술가 헬레 호브의 퍼포먼스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무대로 확장시키기로 했다.
이진엽과 헬레 호브가 공동연출을 맡고 서현성과 바톨 압둘라가 퍼포머로 참여하는 이번 공연은 관객이 주인공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 설치된 4면 객석으로 초대돼 모래 위에 저마다의 그림을 그리는 여정에 나서게 된다. 1200석 규모의 대극장 객석을 비워두고 무대를 빙 둘러싼 객석을 만든 것이 독특하다. “대극장에 갈 때마다 좌석에 따라 가격도, 보이는 풍경도 다른 것이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와 이코노미 클래스처럼 느껴졌다”는 그는 “언젠가 대극장에서 공연한다면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연출가 이진엽.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제공
관객을 구경꾼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은 이진엽이 20년 가까이 이어온 작업의 뼈대다. 영국에서 무대미술을 공부한 그는, 극장을 찾는 대중만을 위한 예술에 의문을 품고 일찌감치 극장 밖으로 눈을 돌렸다. 졸업 작품부터 도시 곳곳을 이동하며 장소특정형 공연을 펼쳤다.
귀국 후인 2009년에는 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를 창단하고 주물 노동자들이 밀집한 서울 청계천 일대를 무대로 한 <입정동 바람, 바람> <동네박물관 시리즈> <두 도시 주물이야기> 등을 선보였다. 이진엽은 “청계천(입정동)에서 첫 작품을 만들 때 주물공장 노동자 한 분이 ‘평생 한 번도 공연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며 “공연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공연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소에서 출발한 관심은 곧 그곳에 사는 사람과 공동체로 확장됐다. 재개발 지역의 노동자, 노인, 시각장애인, 난민 등 다양한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공연 안으로 끌어들였다. 안산의 난민 공동체와 함께한 <물질>, 비시각장애인 관객이 시각장애인의 감각을 경험하는 <커뮤니티 대소동> 등이 그 예다.
이진엽은 “처음부터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며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재개발과 복지 사각지대, 이주와 차별 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장소성’과 ‘커뮤니티’, ‘관객 참여’가 이진엽의 작품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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