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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해외 거점병원, 의료기기 글로벌 인허가 전진기지로 재구성해야"

사전 미팅 질의, 심사 과정 추가 질문 대응등 에는 규제과학과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겸비한 전담 인력이 필요하지만, 많은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외부 컨설턴트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해외 거점병원, 임상·실증...

"해외 거점병원, 의료기기 글로벌 인허가 전진기지로 재구성해야"

이준영 차의과학대학교 헬스케어융합학부 조교수

글로벌 시장조사에 따르면 세계 의료기기 시장은 향후 10년간 연평균 약 6% 성장해 2034년에는 약 1조1400억달러 규모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AI, 로봇수술, 디지털 치료기기 등 신기술이 기존 의료기기와 결합하며 산업 간 경계를 빠르게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의료기기산업은 디지털 헬스·소프트웨어·데이터 산업과 맞물린 복합 산업으로 재편되고, 국가 수출과 미래 성장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와 ICT 분야에서 축적해 온 제조 경쟁력을 바탕으로 체외진단기기와 초음파 영상장비 등 일부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 수준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기술개발 이후 단계, 즉 실증과 인허가, 임상시험과 글로벌 진출 과정에서는 여전히 높은 장벽이 존재한다. 연구개발에는 성공하지만, 실제 임상환경에서의 유효성·안전성 검증, 복잡한 해외 인허가 준비, 시장 진입 전략 수립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소중한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기술 개발을 혁신의 '도착점'이 아닌 사업화 여정의 '출발점'으로 재정의하고 이후 전 주기를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바라보는 관점 전환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은 있지만 시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국내 의료기기산업의 성장 잠재력은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FDA 인허가, 글로벌 진출의 신뢰 기반

미국은 단일 국가 기준 세계 의료기기 시장의 약 40%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이 때문에 많은 기업이 미국 진출을 글로벌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FDA 인허가의 의미는 단순히 이 거대 시장 진입을 위한 티켓에 머물지 않는다. 의료기기는 위험도와 특성에 따라 510(k) 심사, De Novo 분류, PMA(시판 전 허가) 등 서로 다른 경로로 시장에 진입한다.

경로마다 요구되는 데이터 수준과 심사 기간이 크게 달라 개발 초기부터 어떤 경로를 목표로 할지 전략을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국내 기업이 방향 설정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동시에 FDA 인허가 체계는 세계 규제당국이 가장 대표적인 기준으로 삼는 체계 가운데 하나다. 중동, 동남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신흥국 규제당국은 FDA 인허가 자료를 자국 심사의 주요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일부 국가는 선진 규제기관의 허가 이력을 근거로 심사를 간소화하거나 신속심사 트랙을 운영한다. FDA 인허가는 미국 시장을 넘어 글로벌 확산의 신뢰 기반이 되는 ‘레퍼런스 규제’로 기능하는 셈이다.

반대로 FDA 인허가 없이 국가별 개별 인허가를 순차적으로 추진하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규제·임상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일수록 국가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어 시간과 비용 부담이 급격히 늘어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기업이 생기는 이유다.

FDA 인허가에서 마주하는 5가지 벽

국내 의료기기 기업이 미국 인허가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인허가 경로 선택의 어려움이다. 동일한 기술도 제품 포지셔닝과 비교대상 기기에 따라 적합한 경로가 달라지지만, 많은 기업이 개발 막바지에야 경로를 수정하거나 임상 설계를 다시 짜는 상황에 직면한다.

둘째, 임상·비임상 데이터 요구 수준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FDA는 실제 사용 환경에서의 안전성과 유효성 입증을 요구하는데, 국내 또는 다른 규제 기준으로만 설계한 데이터가 미국 기준과 맞지 않아 추가 시험을 요구받는 사례가 빈번하다.

셋째, 사용적합성(Usability)과 인간공학(Human Factors) 평가 대응의 한계다. 디지털 헬스기기와 SaMD(의료기기 소프트웨어) 비중이 커지면서 사용자 인터페이스·사용 오류 분석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시험하고 정리할 인프라와 인력이 국내에 충분치 않다.

넷째, 미국 내 임상시험 운영 경험 부족이다. 현지에서 IRB 승인, 피험자 모집, 임상 수행을 진행하려면 병원 네트워크, CRO(임상시험수탁기관), 윤리·법률 자문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하지만, 이를 자체 구축하기는 대기업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다.

다섯째, 규제 문서 작성과 FDA와의 커뮤니케이션 역량이다. 사전 미팅 질의, 심사 과정 추가 질문 대응등 에는 규제과학과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겸비한 전담 인력이 필요하지만, 많은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외부 컨설턴트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해외 거점병원, 임상·실증 플랫폼으로 재해석

이런 문제를 개별 기업이 각자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국내 의료기관들이 구축해 온 해외 거점과 협력 네트워크다. 일부 의료기관은 미국, 중동, 동남아 등에서 현지 거점병원을 운영하거나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해 왔다. 이 인프라를 지금까지는 주로 '의료서비스 수출'과 '글로벌 헬스케어 협력' 관점에서 활용해 왔지만, 국내 의료기기의 글로벌 인허가와 실증을 지원하는 전략적 자산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미국 내 거점병원·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국내 기업이 FDA 인허가에 필요한 임상시험과 사용적합성 평가를 수행하는 모델을 구축하면, 기업은 현지 병원 네트워크와 IRB, 임상 운영 노하우를 처음부터 만들 필요 없이 이미 신뢰를 쌓아 온 국내 대형병원–해외 거점병원 간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비용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인허가 전 과정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구조적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해외 거점병원의 역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현지 의료진과의 공동 연구로 실제 진료 환경에서의 사용성을 검증하고 국제 학술지에 발표해 제품의 글로벌 신뢰를 높일 수 있다. 미국에서의 초기 실증이 성공한 뒤에는 중동·동남아 거점병원을 중심으로 현지 적용 가능성을 검증하는 후속 연구로 이어가며, 신흥국 시장 확산을 준비하는 테스트베드로 활용할 수 있다.

공동 인프라와 제도 설계, 정부와 산업계가 함께 구체화

이런 전략은 시장 자율에만 맡겨서는 실현되기 어렵다. 해외 거점병원과 국내 기업, 규제 전문가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하는 작업에는 상당한 초기 투자가 필요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핵심은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인허가 준비 과정을 '공동 인프라'로 전환하는 것이다. 전략 지역 해외 거점병원 내에 국내 의료기기 기업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실증·사용적합성·임상 지원 플랫폼을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FDA 등 주요 규제기관 요구 수준의 시험과 평가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춰야 한다. 현지 IRB와 임상시험 운영 체계와의 긴밀한 연계도 필수다.

또한 기업–병원–규제 전문가를 연결하는 매칭 플랫폼을 마련해, 기업이 단계별로 필요한 지원을 쉽게 파악하고 진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전검토 대응·기술문서 작성 지원 체계를 제도화하면 인허가 과정의 불확실성이 크게 줄어들고, 글로벌 규제 대응 능력을 국가 차원의 역량으로 축적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기술에서 시장까지, 완결된 생태계 구축

의료기기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임상에서 유효성과 안전성이 검증되고 인허가를 통해 제도권 안으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시장에서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국내 의료기기산업이 글로벌 무대에서 한 단계 도약하려면, 기술개발을 출발점으로 삼아 실증–인허가–시장 확산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생태계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FDA 인허가를 글로벌 진출의 전략적 중심축으로 삼고, 해외 거점병원을 임상·실증·인허가를 위한 현지 플랫폼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정부와 산업계가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와 제도를 함께 구체화해 나갈 때, 국내 의료기기산업은 국민 건강을 지키는 든든한 방패이자 미래 경제를 견인하는 수출 성장 엔진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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