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의 반도체 장비 계열사 한화세미텍의 HBM 장비 수주 기대감 뒤에 숨겨진 재무 리스크를 집중 점검한다.
한화세미텍 2세대 하이브리드본더 'SHB2 Nano'/사진제공=한화세미텍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 공급망 진입을 계기로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 내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지만 수익 창출 능력과 보상 체계 간 간극으로 우려를 사고 있다. 2년 연속 영업현금흐름이 순유출을 기록하고 협력사 매입채무가 700억원대로 급증한 상황에서 한화그룹 공통 보상 제도인 RSU(양도제한조건부주식) 관련 부채를 지속적으로 적립해야 하는 구조적 모순에 빠진 탓이다.
적자 계열사가 그룹의 보상 정책을 떠받치기 위해 기초 체력을 깎아먹으며 부채로 버티는 '재무적 악순환' 상황임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459억' 평가손실…모기업 주가상승에 재무 '결정타'
7일 한화세미텍의 2025회계연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이 회사가 기록한 '기타금융부채평가손실'은 무려 459억원에 달한다. 장부상 나타난 이 대규모 손실의 실체는 한화그룹이 임원진 보상을 위해 시행 중인 RSU(양도제한조건부주식) 제도에서 비롯됐다.
비상장사인 한화세미텍은 자기 주식이 없어 임원 보상을 상장 모기업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의 주가와 연동해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문제는 회계 원칙상 주가가 오를수록 회사가 미래에 치러야 할 보상 비용도 함께 커진다는 점이다. 회사는 이 상승분만큼을 장부상 '부채'로 반영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이 회계 장부 상 '기타금융부채평가손실'로 처리된다.
K-방산 수출 호조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등의 주가가 급등하자 자회사인 한화세미텍이 임원들에게 줄 주식 비용도 높아졌다. 이것이 곧 지난해 한화세미텍이 수백억원의 장부상 손실을 떠안게 된 이유다.
주목할 점은 이 평가손실액(459억원)이 본업인 장비 사업에서 발생한 영업손실(216억원)보다 두 배 이상 크다는 점이다. 반도체 장비를 팔아 본 손해보다 임직원 보상을 위해 장부에 새긴 계산상의 손실이 회사 재무제표를 더 악화시킨 셈이다.
업계와 시장에서는 이런 구조가 한화세미텍의 자생력을 근본적으로 해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본업에서 아무리 이익을 내도 모기업 주가라는 통제 불능의 변수가 회사의 최종 수익성을 결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반도체 등과 사활을 건 기술 경쟁에 쏟아야 할 자원과 에너지가 그룹 차원의 보상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부채 적립에 묶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협력사 대금은 '700억 외상'…임원 보상은 '장부상 우선 적립'
이런 재무적 모순은 자금 집행의 우선순위마저 뒤바꿔놨다. 지난해 한화세미텍의 영업활동현금흐름은 -175억 원으로, 제품을 팔아도 실제 회사 금고에 현금이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2년째 지속됐다. 유동성이 마르자 회사는 대금 지급을 미루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실제 지난해 말 기준 장기매입채무(외상값)는 700억원으로, 전년(241억원) 대비 3배 가까이 폭증했다.
장비업계에서 수주가 늘며 외상값이 발생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한화세미텍처럼 현금흐름이 2년 연속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외상값만 급격히 늘어나는 건 이례적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장부상 '매입채무의 증감' 항목으로 약 17억5000만원의 현금 유입 효과를 낸 점은 뼈아픈 대목이다. 이는 협력사에 줄 돈을 제때 갚지 않고 뒤로 미루면서 기말 현금이 덜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갚아야 할 빚을 늘려 마이너스 폭을 줄였을 뿐 영업 경쟁력이 좋아진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현장 생태계를 떠받치는 협력사 대금 700억원은 외상으로 돌린 반면 모기업 주가와 연동된 RSU 관련 비용은 재무제표상 부채로 최우선 적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자 기업이라면 보상 규모를 줄이거나 시기를 늦추는 게 상식이지만 한화세미텍은 그룹 정책을 고수하느라 보상용 채무를 먼저 챙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회사의 한정된 자원이 생산 라인을 유지하는 실무적인 곳보다 그룹의 인사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먼저 배분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지배구조 강화 vs 계열사 건전성 '충돌'…HBM 수혜 무색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미래비전총괄 부사장/사진 제공=아워홈
한화세미텍이 재무적 부담을 무릅쓰면서까지 RSU 체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그룹 차원의 전략적 결정을 한화세미텍만 거스를 순 없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한화그룹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서 비주력 사업을 떼어내 '한화머시너리앤서비스홀딩스(가칭)'를 신설하는 등 김동선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RSU는 경영진의 책임 경영을 유도하는 동시에 향후 승계 과정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할 핵심 도구로 활용된다. 결국 한화세미텍 한 곳의 재무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그룹 전반의 보상 체계와 승계 시나리오를 거스르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RSU가 경영진의 장기적인 책임 경영을 유도하는 도구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현금이 마른 계열사에는 자본의 자생력을 갉아먹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한미반도체와 사활을 건 기술 경쟁을 벌여야 할 시기에 모기업 주가 상승에 연동된 부채 평가액 때문에 재무제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심각한 경영 리스크"라고 꼬집었다.
한화세미텍이 장부상 기록된 수천억원 규모의 미래 기대 수익을 현실화하려면 현재의 '외상 경영'과 '보상 부채' 문제부터 풀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룹 보상 시스템을 떠받치느라 계열사의 재무 체력을 소진하는 구조가 이어진다면 한화세미텍이 거둔 HBM 사업 성과는 실속 없는 장부상 숫자에 그칠 위험이 제기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HBM 수혜주라는 화려한 외관 뒤에 숨은 RSU 부채와 매입채무의 비정상적 증가는 한화세미텍의 기초 체력이 바닥났음을 알리는 신호"라며 "특히 모기업 주가에 연동된 RSU 구조는 향후 실질적인 현금 부담으로 돌아오는 만큼 그룹 차원의 자본 확충 없이는 수주 확대가 오히려 재무 리스크를 키우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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