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희 문학평론가
낭만의 시대였을까.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지핀다는 목소리와 함께 도수 높은 술을 광고하던 한 시절. 과장되게 남성성 넘치는 인물이 등장하고, 말을 타고 물가를 질주하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남성의 근육과 말의 다리, 물살이 흩어지는 장면과 술이 왜 연결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낭만이란 본래 논리보다 감성에 기대는 법이려니. 그 무렵 더운 여름날 샌들을 신을 때도 여성들에게는 스타킹이 필수였다. 양말도 아니고 꼭 스타킹이어야 했다.
그런저런 기준들이 허물어졌다. 절대적일 것 같던 경계가 해체돼 왔다. 단일한 기준으로 설명되던 세계는 사라지고, 여러 기준이 병존한다. 개인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적절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한때는 확고했던 관습을 지키려는 노력은 피로를 가중하고, 기존 이치대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자주 실패한다. 경험을 앞세우는 말은 ‘라떼’로, 오래된 기준은 ‘꼰대스러움’으로 밀려난다.
소통 방식 바뀌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지난달 아들 혼사 치른 여인을 마주쳤다. 이미 사위를 둘이나 본 터이고 막내 아들이니 느긋할 만도 한데, 사위보다 며느리가 훨씬 어렵다고 했다. 전화번호도 묻지 말라고 딸들이 단단히 이르고, 반찬이나 음식도 챙기지 말라고 했단다. 입맛이 다를 수 있고,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모든 소통은 아들을 통해서만 한다니 관계 줄이는 방법으로 관계를 지키려는 셈이다.
소통으로 치자면 처음 카카오톡은 신세계였다. 음성 통화에 의존하던 시절에 문자로, 그것도 단체로 모일 수 있으니 혁명에 가까웠다. 여러 모임이 단톡방으로 옮겨왔고, 일정과 안건, 농담까지 그 안에서 정리됐다. 예상치 못한 연락이 되기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 안부를 주고받는 연결도 그 안에서 이어졌다. 서로 소식을 묻고 잘 지내기를 축복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편지지를 고르고, 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이던 낭만은 사라졌지만, 가볍게 오가는 표현 속에서도 관계의 온기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간단함을 넘어 점차 번잡스러워지는 단계가 되었을까. 이상하게 디지털에서 관계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이들이 있는지, 아침마다 단톡방에 ‘굿모닝’을 올리고, 저녁이면 수백 개의 메시지를 쌓아놓기도 한다. 카페에서 빵과 커피 찍어 올리는 일상 공유가 반복되고, 그때마다 일상을 묻고 답하는 반응들도 이어진다. 그 흐름에 끼지 않으면 모가 난 것 같고, 매번 참여하자면 고단해진다. 오래 함께해온 관계라면 그 때문에 단교할 수도 없다. 그중 몇몇이 검증할 수 없는 정치 이야기까지 사명에 불타듯이 올리면 그 모임 파하고 싶을 정도로 심경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한 번쯤 물어야 할까. 이건 유정인지, 무정인지. 너무 많이 배달하니 결국 한마디도 기억나지 않는 명언들의 홍수, 무의미한 말과 사진의 범람에 대해. 과해져 오히려 무정에 가까운 결과를 낳는 건 아닌지. 반복되는 일상노출, 자랑에 가까운 장면들, 과도한 연락은 관계를 깊게 하기보다 지치게 만든다. 일상노출이 많을수록 오히려 피로가 먼저 쌓이는 역설이 생긴다. 끊임없이 보여지고, 동시에 보고 있어야 한다는 상태는 집착과 유사한 상태를 유발하는 건 아닐까. 원치 않는데 타인의 일상이 보이고, 자랑에 가까운 장면들이 피로처럼 반복될 때 관계는 증발할 수 있다.
하면 이쯤에서 무정으로 돌아가면 해법이 될까. 그 겉으로는 친밀해 보여도 속 깊은 사연을 나눌 계제는 아닌 헐렁해진 말들을 정리하자고 연락을 끊는 건 그냥 단절이 되는 건 아닐까.
결국 모든 관계처럼 카톡으로 상정되는 거리는 유정과 무정 사이 어디 쯤에 놓여야 할지. 너무 많은 소식은 피로를 만들고, 너무 적은 소통은 단절을 만들 터이니 그 사이에서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것을 구분해야 할까. 무정의 여백과 유정의 온기가 서로를 침범하지 않도록, 덜 지치면서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잘 지켜가기 위해. 거리 조절이 쉬울 수 없는 이유는 이것도 상대적이기 때문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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