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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이루는 자 [코즈모폴리턴] ​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을 비난한 데 이어 스스로를 예수에 빗댄 인공지능 생성 그림을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교인들마저 “적그리스도의 거짓 가르침에 사로잡혔다”며 한탄했다. 그전까지 기독교 복음주의에선...

평화를 이루는 자 [코즈모폴리턴]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교황 레오 14세를 비판한 뒤 자신의 소셜미디어 플랫폼 ‘트루스 소셜’에 게시한 인공지능 생성 이미지와 트럼프 사진. AFP 연합뉴스

정유경 | 국제뉴스팀 기자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5장 9절)

전쟁을 멈춰야 한다고 했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은 교황 레오 14세는 지난 13일(현지시각)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도 평화 촉구 목소리를 내겠다며 위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일부 사람들이 행하듯 복음의 메시지가 오용돼선 안 된다. 복음의 메시지는 평화를 이루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구절이 낯익을 것이다. 지난달 29일,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이 바로 그 성경의 ‘평화를 이루는 자’이므로 천국에 갈 것”이라고 쓴 한 목사의 편지를 공개했다. 교황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랑삼은 구절을 인용해 “오용”됐다고 꼬집은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인이 아니라 훌륭한 교황이 되는 데 집중하라”며 교황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트럼프 행정부야말로 먼저 정치에 종교를 끌어들였다. 기약 없는 전쟁에 부정적인 지지층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력을 설득하려면 ‘신의 뜻’이 필요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공식 브리핑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승전을 기도해달라고 하는 등,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에 기독교 ‘성전’의 의미를 부여했다. 헤그세스 장관은 “조국의 적에게 총알이 명중하게 하시고” “병사들이 자비를 베풀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압도적 폭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공개 기도했다.(3월25일) 이에 3월29일 교황은 종려주일 미사 때 “예수는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의 왕’이시니, 누구도 그분을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할 수 없다. 그분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대상은 명확했다.

14일(현지시각) 이탈리아 신문들은 1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교황 레오 14세에게 한 발언을 “트럼프, 교황 모독” “트럼프발 분열” “트럼프, 레오 14세에게 충격적 공격” “교황 모독” 등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AP 연합뉴스

교황의 설교는 가닿지 않았다. 일부 지지자는 심지어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 전쟁을 이어가는 트럼프 대통령을 ‘핍박받는 예수’의 자리에 가져다 댔다. 트럼프 대통령의 ‘영적 멘토’로 알려진 폴라 화이트 목사는 지난 1일 백악관 부활절 오찬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예수는 모두 박해받는 인물”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신은 선하시므로 우리를 지지할 것”(6일)이라고 했다. 7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민간 기반시설을 부수겠다며 “문명 전체가 멸망할 것”이라고 하자, 결국 교황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희생될 어린이와 노인을 생각해보라”고 직접 반박하기에 이르렀다. 11일 교황은 소셜미디어 엑스(X)에 “하느님은 어떤 전쟁도 축복하지 않는다”고 썼다.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을 비난한 데 이어 스스로를 예수에 빗댄 인공지능 생성 그림을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교인들마저 “적그리스도의 거짓 가르침에 사로잡혔다”며 한탄했다.

그전까지 기독교 복음주의에선 트럼프 대통령을 키루스 2세에 견줬다. ‘바빌론 유수’ 때 포로로 끌려간 남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준 페르시아(오늘날 이란)의 왕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키루스 왕을 함께 새긴 이스라엘 기념주화도 있다. 사생활·도덕성 논란이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기독교적 가치와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지지자들은 ‘키루스 왕처럼 예상치 못한 인물이 신의 소명을 이루기도 한다’고 비호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신의 도구’로 여겼던 정치는 이제 노골적인 신성모독 앞에 당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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