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편집인 칼럼] 잿더미에 세운 선경직물··· 73년 후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날 재계 서열 2위, 반도체로 인공지능 시대를 뒷받침하고 있는 SK그룹은 폐허 위에서 재조립된 기계 한... SK그룹, 잿더미에서 반도체까지, 70년 리스크 테이킹의 연대기 SK그룹의 역사는 세 번의 결정적 변곡점을...

[편집인 칼럼] 잿더미에 세운 선경직물··· 73년 후 우리에게 묻는다

고 최종건 창업회장, 전쟁으로 부서진 기계 고쳐 선경직물 창업

SK그룹, 잿더미에서 반도체까지, 73년 '리스크 테이킹'의 연대기

"의사는 한 사람을 살리지만, 기업인은 나라를 구한다"

안정이라는 달콤한 독배를 깨고 야성의 시대로 가야 "진정한 성공"

SK그룹의 역사는 미래를 향한 리스크테이킹의 연속이었다./픽사베이 이미지, 그린포스트코리아 그래픽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45년 4월 초, 경기도 수원 외곽의 한 공장 앞.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갓 졸업한 열아홉 청년 최종건은 흙먼지 날리는 정문을 넘어섰다. 선경직물공장이었다. 그 시절 대다수 청년들에게 직장이란 생존의 방편에 불과했지만, 이 청년은 달랐다. 낡은 방직기의 금속성 마찰음 속에서 그는 자신의 미래를 읽고 있었다.

입사 넉 달 만에 8·15 해방이 찾아왔다. 일본인 주인은 떠났고, 공장은 '적산기업'이라는 이름만 남긴 채 표류했다. 최종건은 혼란 속에서도 직원들을 다독이며 생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터진 6·25전쟁의 포화는 공들여 가꾼 공장을 잿더미로 바꾸어 놓았다.

1953년 휴전 직후, 폐허 앞에 선 스물일곱의 청년 최종건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버려진 직기 부품들을 손수 모아 닦고 다시 조립해 '선경직물'을 창업했다. 그날이 바로 73년 전 오늘, 4월 8일이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무모함을 넘어선 결정이었다. 그의 결단은 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한국 기업가 정신의 원형이었다. 오늘날 재계 서열 2위, 반도체로 인공지능 시대를 뒷받침하고 있는 SK그룹은 폐허 위에서 재조립된 기계 한 대에서 출발했다. 1973년 마흔넷의 나이로 최종건 회장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뿌린 기업가 정신의 씨앗은 동생 최종현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SK그룹, 잿더미에서 반도체까지, 70년 리스크 테이킹의 연대기

SK그룹의 역사는 세 번의 결정적 변곡점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단순한 사업 확장이 아니라, 경영진이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룹의 운명을 건 '베팅'을 감행한 결과였다.

창업주 최종건 회장이 "우리의 슬기와 용기로 뚫지 못할 난관은 없다"는 신념으로 섬유 산업의 기틀을 닦았다면, 그의 후계자 최종현 선대회장은 그 위에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다. 전쟁 직후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 최종건 회장은 국산 기술로 만든 옷감을 국민에게 입히겠다는 일념으로 나일론 안감을 최초로 생산하고 수출의 문을 열었다.

그 뜻을 이어받은 최종현 회장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를 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전무후무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던 시기에 정유사를 인수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원 빈국인 한국에서 에너지 주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섬유 산업의 미래 또한 없다는 냉철한 통찰을 바탕으로 과감히 서명했다.

SK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인수였다. SK가 써낸 인수가격은 주당 33만5000원, 총 4271억 원으로 시장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최고가였다. 내부 임원들이 "너무 비싸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일 때, 최종현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주식을 산 것이 아니라 미래를 산 것이다."

이 같은 리스크 테이킹의 DNA는 2012년 하이닉스 인수로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반도체 업황이 불투명하던 시기에 단행된 이 결정은 SK를 내수 기업에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테크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잿더미 속에서 직기를 고치던 최종건의 손길이, 오늘날 나노 단위의 회로를 새기는 반도체 공정으로 이어진 셈이다.

도전과 모험, 세계 자본주의를 움직인 원동력

이러한 기업가 정신은 비단 SK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 발전을 이끈 위대한 창업가들의 발자취는 하나같이 모험의 연속이었다.

헨리 포드는 기계공으로 일하며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29세에 자동차 회사를 창업하는 모험에 나섰다. 두 번의 실패 끝에 40세의 나이로 재기한 그는 '누구나 탈 수 있는 싸고 좋은 차'라는 혁명적 목표를 내걸고 세계 산업의 역사를 새로 썼다.

일본의 소니도 다르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는 불에 탄 도쿄의 한 백화점 지하 창고에서 단돈 19만 엔으로 '도쿄통신공업'을 세웠다. 당시 라디오는 거대한 진공관을 품은 가구 크기의 비싼 장비였다. 두 사람은 이를 '개인용'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현실로 바꾸었고, 마침내 '소니 신화'를 창조했다.

1930년대 중반, 월트 디즈니가 세계 최초의 장편 컬러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기획했을 때 할리우드는 이를 '디즈니의 어리석음(Disney's Folly)'이라 비웃었다. 그러나 디즈니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온 세대가 함께 즐기는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확신했다. 집을 담보로 제작비를 마련한 끝에 1937년 개봉한 이 작품은 전례 없는 흥행 신화를 쓰며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세웠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는 월가의 촉망받는 헤지펀드 DE쇼(D.E. Shaw)의 최연소 부사장이었다. 높은 연봉과 보장된 미래를 뒤로하고, 그는 인터넷 이용자 급증 추세를 보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80세가 된 내가 이 도전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사직서를 냈다. 전도유망한 커리어의 정점에서 맨바닥을 향해 기꺼이 뛰어내렸다.

"안정이라는 달콤한 독배를 깨고 야성의 시대로"

최종건, 최종현, 헨리 포드, 모리타 아키오, 월트 디즈니, 제프 베이조스. 이들 위대한 창업가들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선명하다. 진정한 가치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위험의 정중앙'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당대의 안정적인 길만을 걸었다면, 세계 경제를 뒤흔든 혁신도, '한강의 기적'도 없었을 것이다.

청년 최종건이 잿더미 속에서 직기를 조립하던 73년 전에 비해 지금의 대한민국은 풍요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 풍요의 이면에는 '도전 회피'라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높은 지능과 잠재력을 가진 청년들이 실패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창업이나 기초학문을 외면하고, 안정적 고소득을 보장하는 의대로만 몰리고 있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리스크 테이킹의 역량이 고갈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위험한 징후다.

모험보다 안주를, 혁신보다 보전을 택하는 이 '안정 지향의 시대'에, SK 창업가들의 야성은 우리에게 무겁고도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전쟁 직후, 촉망받는 공업학교 출신의 청년이 안정된 직장 대신 위험의 사지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 '창조적 파괴'의 DNA는 과거의 한국만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 주도할 미래 한국에서도 변치 않을 성공의 공통분모다. 오늘, 그 낡은 기계의 첫 박동 소리를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경훈 편집인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