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을 앞둔 40대 여성 A씨. 그는 치매 증상도 없고 유언을 남길 나이도 아니지만, 한 은행을 찾아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했다. 이유는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때문이었다. 재혼 전 모은 재산을 은행에 맡기고, 본인이 계획한 대로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A씨는 “재혼을 하면 혼전에 모은 재산과 재혼한 남편과 모은 재산이 뒤섞일 수밖에 없다”며 “자녀에게 상속할 재산은 재혼 전에 명확히 선을 긋고자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했다”고 말했다.
홀로 사는 50대 남성 B씨도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했다. 혼자서 장만한 아파트와 현금 등 15억원 상당의 재산을 은행에 맡겼다. 그는 사망 이후에 평소 연락도 없는 형제나 조카들에게 재산이 상속될 수 있다는 게 못마땅했다. B씨는 “노년에 치매에 걸린다 한들 형제나 조카들이 돌봐줄 리 없다”며 “사후에 재산은 어린이 복지센터에 기부하고 싶다”고 밝혔다.
부유층 노인의 전유물로 인식된 유언대용신탁이 빠르게 보편화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사리 분별이 또렷할 때 은행 등에 자산 관리를 맡기고, 계약자가 사망하면 계약 내용에 따라 재산을 배분하는 신탁 상품이다. 복잡한 유언장 작성이나 공증도 필요 없고, 치매 등으로 인지능력이 떨어지면 은행이 알아서 병원비와 요양비, 장례비 등을 집행한다. 최근에는 고령층 ‘치매 머니’ 관리를 넘어 1인 가구의 재산 기부, 재혼 시 독립적인 재산 관리 등 다양한 서비스로 진화 중이다.
올 상반기 3조6773억…지난해 한 해 가입액 이미 초과
23일 중앙일보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최근 5년간 유언대용신탁 가입금액을 집계한 결과, 올 상반기 가입금액은 3조6773억원에 달했다. 지난 한 해 동안 가입한 금액(3조4421억원)을 이미 초과한 수치다.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던 유언대용신탁 가입금액이 치솟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지난해는 한국의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20.7%)이 20%를 넘어 국제연합(UN) 기준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해다. 은행권 관계자는 “고령화에 일반 국민도 ‘치매 머니’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커졌고 상품 가입금액도 크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