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 바꾼 세계사 한 장면(5)
1999년 대만 921 대지진
사망자 2415명, 피해액만 100억 달러…중앙정부마저 마비
TSMC 위기 극복 비결은? 지진 대비, 정부 노력, 협동 정신
많은 사상자를 낸 대만 921 대지진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 TSMC라는 기업의 이름을 처음 알리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로이터=연합뉴스]
포유류는 생활이 안정되고 환경을 예측할 수 있을 때 번식한다. 앞날이 불투명하면 생존과 대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나는 오늘날 출산율이 낮아지는 이유가 불행보다는 불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2020년대 들어 연이어 터진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란 전쟁은 우리 삶의 예측 가능성을 흔들고 있다. 우리 문명이 얼마나 정교하고 예민한 톱니 위에서 돌아가는지 체감하는 요즘이다.
훗날 난세의 초입이라고 불리게 될지 모르는 목하,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면 단연 ‘공급망’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99년 대만 921 대지진을 통해 대만이 반도체 공급 위기를 어떻게 넘겼고, 그 결과가 오늘날 세계 반도체 산업에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 살펴본다.
921 대지진으로 드러난 대만의 지표 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20세기 대만은 성공한 레닌주의 국가라 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는 소련 붕괴와 함께 사라졌지만, 이를 기묘하게 비튼 레닌주의의 후예는 몽골에서 갈라져 나와 인도에 정착한 무굴제국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중국국민당은 국부 쑨원(孫文) 시절부터 러시아혁명에 자극받아 레닌주의를 수용했다. 대만 레닌주의는 정통 레닌주의가 아니라 유사 레닌주의(Quasi-Leninism)라 한다. 이들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튼 레닌의 ‘일당 독재’를 나름의 방식으로 흡수했다. 한국과 달리 대만은 1987년까지 계엄령 아래 철권통치를 이어가며 다른 정당을 허용하지 않았다.
성공한 레닌주의의 변주
국민당은 난징(南京) 정부 시절 상하이 자본가 계급에 휘둘렸던 트라우마 탓에 토착 자본가 계급이 생기는 것을 막고자 했다. 대부분의 기간산업은 국가와 당이 운영했는데, 많은 기업이 국영기업이거나, 심지어는 당이 직접 운영하는 당영기업 형태로 만들어졌다. 과감한 토지개혁으로 지주 계급의 힘도 뺐다. 집권 세력이 대륙 출신(외성인)이었기에 토착 지주(본성인)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이 계속되면 새로운 자본과 지식으로 무장한 자본가와 인텔리겐차(지식인)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국민당은 국부천대(國府遷臺, 장제스가 중화민국 정부를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옮긴 사건) 이전부터 시행되던 지방자치는 중단하지 않았기에 서서히 본성인 출신들이 지방자치 단체장으로 진출했다. 타이베이-국민당-외성인, 타이난-당외(黨外) 본성인의 갈등 구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토지개혁으로 형성된 소농이 경제적으로 상승할 방법은 국가와 당이 하지 않는 틈새시장을 비집고 들어가는 길이었다. 국가를 믿을 수 없기에 가족과 꽌시(關係)로 뭉친 중소기업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한다. 대만 경제는 성공적인 중소기업 경제 모델로 손꼽힌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다. 냉전 구도가 바뀌는 ‘전환시대’가 왔다. 대만은 경제와 무역으로 생존의 보루를 만들고자 했다. 이때 주목한 것이 반도체였다. 민간기업은 반도체와 같은 대규모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어려웠다. 대만 공업기술연구원장 ‘모리스 창(張忠謀)’은 선진국의 위탁생산이라는 대만 산업구조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반도체 제조에 특화된 국영기업을 만들도록 국민당 정부를 설득했다. 이렇게 1987년 대만반도체제조주식회사(台灣積體電路製造股份有限公司,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 Ltd.)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잘 아는 TSMC의 시작이다.
대만 921 대지진으로 스강댐의 수문과 본체가 일부 붕괴, 파손된 모습. 전기, 수도, 가스, 철도 도로가 파괴된 대만 중앙정부는 정확한 피해 상황을 집계하고 컨트롤할 수 없었다.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1999년 9월 21일 새벽 1시 난터우현(南投縣)에 규모 7.7의 지진이 발생한다. 2415명이 사망하고 1만 130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피해액은 당시 기준 미화 100억 달러로 추산된다. 전체 사망자의 절반에 달하는 1267명의 사망자가 인근 대도시인 타이중(臺中)에서 나왔다. 대만도 일본처럼 건축 기술, 지질학 발전과 궤를 같이해 건축 규제를 보강해 왔지만, 피해는 규제 이전에 지어진 낡은 벽돌집에 집중됐다. 당시 전체 건축물의 5%였던 벽돌집에서 전체 사망자의 43.5%가 나왔다.
인프라도 마비되었다. 전기, 수도, 가스, 철도, 도로가 파괴되었다. 특히 변전소와 송전탑 피해로 대부분의 발전소가 멈추게 되면서 대만 전역에 대규모 정전이 발생한다. 인프라가 마비되니 중앙정부에서는 정확한 피해 상황을 집계하고 이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단층과 균열이었다. 한국 기초자치단체라 할 수 있는 향진(鄕鎭)급 정부는 지진 피해로 사실상 기능이 마비되었다. 광역단체라 할 수 있는 중간의 현시(縣市)급은 중앙정부에 강한 불만을 가지게 된다. 긴급명령으로 재량권이 부여될 줄 알았으나, 여전히 중앙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정부 관료들이 지방 거점도시로 내려와 사실상 구호와 복구를 지휘하자 불만이 폭발했다. 결국 타이중시(臺中市) 정부는 언론을 통해 중앙정부의 구제 성금은 언제 하달될지 모르니 타이중시 창구로 직접 성금을 보내달라고 시민들에게 촉구했다. 이어 피해가 심각한 타이중시, 타이중현, 난터우현 세 지방정부가 중앙과 다른 개별 창구를 열어 성금을 받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중앙정부 방침에 불만을 가진 지방 관료들이 중앙정부의 복구 계획을 보이콧하거나 사보타주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이 같은 대립이 언론을 통해 상호 공방전으로 이어지며 갈등은 더 깊어졌다.
지진으로 드러난 크레바스
정치학자 미그달(Migdal)은 이 같은 현상을 ‘국가의 분절(fragmentation)’이라 지칭한다. 미그달에 따르면 국가는 단일한 조직이 아닌, 다양한 기관과 행위자들이 분절된 채 경쟁하고 대립하는 조직이다. 이 같은 상황은 오랫동안 쌓인 국민당 통치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는 한편, 지방분권이 반드시 효율적 자원 배분과 위기 회복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진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정권 교체였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국민당 정부에 실망한 대만인들은 이듬해 대선에서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을 총통으로 당선시켰다. 50년 만에 국민당 통치가 막을 내렸다.
대만 전역에서 대대적인 복구가 시작되었고, 내진설계 기준도 크게 바뀌었다. 특히 재난시 피난과 구호지휘 등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되는 학교에 대한 복구가 우선되어 3621개 학교의 2만 7227개 건축물에 대한 대대적인 내진 보강이 시작된다.
민간 건축물도 정부와 건물주의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 대만 지진공학연구센터(國家地震工程研究中心)가 새로운 내진 설계 기준과 보강 조치를 만들었다. 대만은 한국의 3배 가까운 공사 기간이 걸린다고 이야기되는데, 이렇게 강화된 규정 탓이 크다. 건물 높이가 낮고 ‘필로티 양식(1층을 기둥으로 들어 올려 벽을 제거해 개방적으로 만든 구조)’이 주를 이루는 것도 지진 때문이다. 지진이 나면 사람이 언제든 필로티 안으로 피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만 내진 설계와 시공 능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 타이베이101 빌딩이다. 2004년 완공되어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가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했던 마천루였다. 빌딩 안에는 문어처럼 생긴 거대한 추와 댐퍼(진동 에너지를 흡수하는 장치)가 있는데, 건물 진동 시 움직이는 추의 운동에너지를 댐퍼가 열에너지로 바꾸어 진동을 감쇄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후에도 대만에는 큰 지진이 수차례 계속되었으나, 921 대지진과 같은 큰 피해는 더 나오지 않았다. 대만의 지진 대비는 상당한 성과를 보여주는 모범사례로 꼽혔다.
처음 이야기한 반도체 공급망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921 대지진은 세계에 TSMC라는 기업의 이름을 처음 알리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D램 가격이 3배 이상 치솟기 전에는 위탁생산 회사 이름까지 알려질 일이 없었다.
타이중과 신주과학단지의 공장이 지진으로 가동이 중단되었다. 1998년 기준 대만은 세계 파운드리 생산의 53.9%, D램 생산액 10.3%를 차지했다. 지진 때문에 반도체 생산기지가 대만에서 한국과 싱가포르로 옮겨갈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삼성전자와 싱가포르 차타드반도체(Charter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의 주가가 급등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
대만 반도체 산업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겼을까. TSMC를 오랫동안 취재해 온 린훙원(林宏文)은 위기 극복 요인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대만 기업들의 준비된 대응 능력이다. TSMC는 921 대지진 이전부터 지진 대비를 철저히 했다. 지진 직전에 타이난에 지어진 남부과학단지 6공장이 이미 진도 8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 직원들도 지진·화재·정전 등 다양한 상황에 대비한 모의 훈련을 꾸준히 해왔다. 둘째는 정부의 노력이다. 기간산업 피해를 막기 위해 대만전력이 최선을 다해 반도체 공장에 우선 전력을 공급했다. 셋째는 대만 기업들의 협동 정신이다. 평소에는 경쟁 관계였던 기업들이 재난이 닥치자, 서로의 생산 정상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선 덕이다. 직원들이나 기술자들은 대부분 고향이나 학교 선후배 관계로, 회사가 달라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생산기지는 물건만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좋은 인재를 근거리에서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만 921 대지진 10주년 전날 재건이 완료된 타이베이시 쑹산구의 둥싱 빌딩의 모습. 지진 이후 대만 전역에서 대대적인 복구가 시작되었고, 내진설계 기준도 크게 강화됐다. [사진 위키백과 퍼블릭 도메인]
실리콘 방패의 등장
대만 반도체 산업은 지진으로 공장 내 웨이퍼(원형 판)를 전량 폐기했지만, 2주 만에 생산을 재개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공급망의 회복 탄력성이 증명된 셈이다. 이로써 전 세계 반도체 위탁생산기지를 향한 하나의 의구심은 해결되었다. 3개월 후에는 반도체 가격도 다시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발주처들은 더 안심하고 반도체 생산을 위탁했다.
921 대지진 이후 대만 반도체 산업의 양적 성장은 두 번째 의구심마저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을 만들어냈다. 의구심의 이름은 불안한 ‘양안 관계’였고 해결책의 이름은 ‘실리콘 방패(Silicon Shield)’였다. 지진 10년 후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중 대만 비중은 64%로 10% 가까이 상승했다. 921이라는 ‘잠시 멈춤’을 경험한 세계가 대만 반도체 생산이 다시 중단되도록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다. 모리스 창도 “TSMC는 중국의 공격에서 대만을 지켜주는 성스러운 산맥”이라며 “중국이 대만을 공격해 오면 TSMC 가동을 멈추겠다”고 경고했다.
권병덕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을 오가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했다. 옮긴 책으로 <공명당과 창가학회>, <북일외교회고록>이 있다.
권병덕 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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