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충당금·보험 K-ICS·비은행 연체 관리 시험대
중동 리스크가 당장 금융시스템 불안으로 번지진 않았지만, 고환율과 고유가, 시장금리 변동성이 길어질 경우 은행 충당금과 보험 신지급여력제도(K-ICS), 비은행 연체율이 순차적으로 압박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버티는 금융사…금융당국, 건전성 테스트 지시
17일 서울외환시장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전날 주간 거래 종가 기준 1474.60원을 기록했다. 3월 말 기록한 1530.10원보다 다소 진정된 상황이지만 여전히 불안한 모습이다.
최근 중동에서 무력충돌을 한 미국과 이란의 협상 기대가 반영되며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날 종가를 기준으로 배럴당 93.40달러까지 내려왔다. 국고채 3년물 금리는 3월 23일 연 3.617%까지 치솟은 뒤 최근에는 4월 15일 기준 3.328%까지 낮아졌다.
이번주는 환율과 유가, 시장금리가 다소 진정된 모습이지만, 여전히 변동성이 우려된다.
이성훈 키움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르면 이번 주 주말 이란과 협상이 가능하다고 언급하며 종전 협상 기대감을 끌어올렸으나 호르무즈 해협 여전히 봉쇄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유가 고착화 우려는 여전히 잠재적 리스크 요인으로 지목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융권의 표면적인 지표는 아직 견조한 편이다.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19일 업권별 리스크 점검회의에서 제시한 수치를 보면 은행권 보통주자본비율(CET1)은 13.59%로 규제비율 8%를 웃돌았고,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도 168.9%로 규제 기준 80%를 크게 상회했다.
6개 은행의 중동 익스포저는 4조3000억원으로 위험가중자산의 0.3% 수준에 그쳤고, 이란·이스라엘 관련 익스포저는 10억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금융당국이 당장 시스템 리스크를 말하지 않는 배경이다.
그런데도 당국이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이유는 직접 노출보다 전이 경로에 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11일 금융시장 리스크 점검회의에서 “중동 상황의 확산과 장기화,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별 스트레스테스트를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금융위원회는 이어 지난달 19일 업권별 점검회의를 열어 은행·보험·여전·저축은행·상호금융의 리스크 요인을 따로 점검했다. 지금은 숫자상 버티고 있어도 고유가에서 물가와 금리로 이어지는 경로가 길어지면 약한 고리가 먼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은행권의 가장 약한 고리는 충당금이다. 중동 리스크가 길어질 경우 정유·석유화학·항공처럼 유가 민감 업종의 수익성 저하가 은행 건전성에 먼저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5대 은행의 지난해 말 부실채권(NPL) 커버리지 비율은 평균 175.6%로 1년 전보다 30.7%포인트 낮아졌다. 아직 절대 수준은 방어적이지만, 충당금 완충력이 예전만큼 두텁지 않다는 신호다. 금융위도 3월 19일 은행권에 유가 민감 업종 익스포저를 지속 점검하라고 주문했다.
보험업권은 금리와 환율이 동시에 압박하는 구조다. 금감원은 3월 12일 주요 보험사 최고재무책임자(CFO) 간담회를 열고 금리·환율·실물경기라는 ‘3각 파도’에 대비하라고 주문했다.
금리 상승은 보험사가 보유한 채권 평가손실을 키워 K-ICS에 하방 압력을 주고, 고환율은 외화자산 평가이익의 착시와 별개로 환헤지 비용 부담을 키운다. 신용평가 분석들도 환율이 1500원선에 근접한 상황에서 보험업권 모니터링 강화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보험사의 자본 체력도 아주 넉넉하다고 보긴 어렵다. 보험연구원 자료를 보면 2025년 6월 말 기준 경과조치 적용 전 K-ICS 비율은 생보 181%, 손보 202%였고, 기본자본 K-ICS 비율은 생명보험 106%, 손해보험 83%였다. 1년 전과 비교하면 각각 하락한 수치다. 지금 당장 규제선 밑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금리·환율 충격이 길어질수록 중소형사를 중심으로 부담이 먼저 커질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해상보험과 해외 부동산도 복병이다. 금융위 3월 19일 회의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인근 선박의 경우 기존 전쟁위험담보 특약이 취소돼 신규 계약 체결이 진행됐고, 총 33건 중 32건의 재가입이 완료됐다. 별도로 금감원이 3월 17일 발표한 자료에서는 지난해 9월 말 기준 금융권의 해외 부동산 대체투자 잔액이 55조1000억원, 부실 우려 규모는 약 2조원으로 집계됐다. 금리와 투자심리 위축이 이어지면 이 자산군도 추가 부담이 될 수 있다.
◇ “규제비율만 맞추면 된다”는 안일함은 통하지 않는다
금융위는 지난달 업권별 리스크 점검회의에서 “자본비율이나 연체율 같은 외형 지표뿐 아니라 자본시장 자금 유입이 수신에 미치는 영향 등 잠재 위험요인까지 종합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은행에는 유가 민감 업종과 취약 부문 충당금, 보험에는 자본 변동성과 듀레이션 갭, 여전·저축은행에는 유동성과 연체 관리가 각각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특히 지역 은행들의 현장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 BNK금융그룹은 3월 1일 위기상황관리위원회를 가동했고, 부산은행과 경남은행은 각각 1000억원 규모의 피해 복구자금을 편성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5대 금융지주와 은행권은 민간 차원에서 신규자금 53조원+알파(α) 공급과 만기연장·상환유예를 추진하고 있고, 정책금융기관 프로그램도 24.3조원에서 26.8조원으로 확대 추진 중이다. 금융시장 충격이 실물 부실로 번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한 완충장치다.
다만 여기에는 역설적인 부분도 있다. 금융권이 유동성을 더 풀수록 신용 리스크가 장부에 더 오래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만기연장과 상환유예는 당장의 연체율 상승을 막아주지만, 중동 리스크가 장기화해 차주 상환능력이 약해지면 부실은 결국 뒤늦게 드러날 수 있다.
은행은 충당금 부담이 커지고, 보험사는 환헤지 비용과 자본 변동성 부담이 누적되며, 비은행권은 자금조달과 연체 관리 압박이 동시에 커지는 구조다. 이런 점에서 지금 국면은 단순한 숫자 방어보다 질적 리스크 관리 역량이 더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은행은 10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반도체 경기 호조와 추경에도 불구하고 중동전쟁에 따른 공급충격으로 성장세가 당초 예상보다 둔화될 것으로 봤고, 물가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상방 압력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금융통화의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린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사진=연합뉴스]
같은 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기자간담회에서 “물가의 상방 압력과 성장의 하방 압력이 동시에 커진 상황에서 중동사태 추이를 더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중동 리스크가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금융안정과 통화정책을 함께 흔드는 변수로 격상됐다는 뜻이다.
결국 지금까지가 ‘지표 방어’의 국면이었다면, 앞으로는 ‘체력 검증’의 국면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은행은 충당금과 취약 업종 익스포저, 보험은 K-ICS와 환헤지 비용, 비은행권은 유동성과 연체율 관리가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각 회사들이 겉으로는 아직 안정적”이라며 “하지만 중동 리스크가 장기국면에 진입할 경우 각회사의 약한 고리에서 건전성 문제가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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