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급 트위스트에 안전자산 금 가격 급락...금 팔아 빚 갚기
전쟁 진앙지 미국 증시↑외국인 매도에 코스피↓‘디커플링’
중동 전쟁과 고유가, 고환율 충격이 금과 증시의 기존 안전판까지 흔들면서 외국인 자금이 코스피에서 32조원 넘게 빠져나갔다.
◇ 전쟁 중 금값 폭락, 시장의 상식 뒤집혔다
30일(현지시간) 미국 경제 전문 방송 CNBC에 따르면 금 근월물은 전 거래일에 비해 0.49% 오른 온스당 4514.40달러에 거래됐다. 1월 말 고점 대비 16% 안팎 하락한 수준이다.
1월 말 국제 금 현물 가격은 온스당 5000달러를 웃돌며 사상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미국과 이란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 미국의 관세 불확실성이 겹치자 투자자금이 안전자산인 금으로 몰렸다.
세계금위원회(WGC)에 따르면 1월 실물 기반 금 ETF에는 187억달러가 순유입돼 월간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중동 긴장 고조에도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 우려와 금리 부담을 키우면서, 금값은 오히려 조정을 받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주요 군사 시설을 정밀 타격한 3월 초 금값은 온스당 5420달러까지 치솟으며 다시 한번 최고가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핵심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태도 변화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2026년 안에 최소 두 차례 금리를 내릴 것으로 기대했다. 6월과 9월이 유력한 시점으로 꼽혔다. 하지만 유가 폭등이 물가 상승 우려를 키우면서 이 기대는 완전히 꺾였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 [사진=연합뉴스]
지난 18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준은 기준금리를 연 3.50~3.75%로 동결했다. 연준이 제시한 점도표(각 위원이 예상하는 금리 경로)에서도 올해 금리 인하 횟수 전망이 기존보다 줄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중동 사태가 미국 경제에 미칠 영향은 매우 불확실하다”면서도 “단기적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이 전체 물가를 끌어올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금리를 내리기 어렵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시카고상업거래소(CME) 페드워치 자료에 따르면, 4월 29~30일 FOMC에서 금리를 동결할 확률은 94.8%에 달한다. 12월까지 금리 인하를 예상하는 시장 참가자는 3%에 불과하다. 반대로 연내 금리 인상 가능성은 38%까지 올라왔다. 전쟁 전 ‘두 번 내릴 것’이라던 기대가 ‘오히려 올릴 수도 있다’로 바뀐 것이다. 연준이 마지막으로 금리를 조정한 것은 2024년 12월이다. 15개월 넘게 금리를 묶어둔 채 관망 중인 셈이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금은 이자가 붙지 않는 자산”이라며 “금리가 높게 유지되면 금 대신 미국 국채나 달러 예금이 더 매력적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달러까지 강세를 보이면서 달러로 가격이 매겨지는 금은 이중으로 압박을 받았다”며 “달러가 비싸지면 다른 나라 투자자 입장에서 금을 사는 데 더 많은 돈이 드니, 수요가 줄어드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인도계 경제매체 더 프린트는 “최근 금값 약세 현상을 공포보다 유동성 여건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과거 3% 금리로 돈을 빌렸던 기업들이 이제 7~8% 금리로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다. 투자자들은 금을 팔아서라도 현금을 확보해야 했다. 안전자산이 아니라 현금 조달 수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일각에선 2026년 3월 금융시장 모습을 두고 ‘현대 금융사에서 안전자산의 정의가 다시 쓰인 달로 기억될 것’이란 의견도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선 높은 원/달러 환율 탓에 안그래도 치솟은 유가를 높게 체감하고 있다.
전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주간 거래 종가 기준 1515.70원에 거래를 마쳤다. 2009년 3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환율이 높으니 같은 달러 가격이라도 원화로 환산하면 금값이 덜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한국금거래소 기준 3월 28일 금 한 돈(3.75g) 살 때 가격은 95만5000원이었다.
◇ 한·미 증시 디커플링 현상까지
금값만 뒤집힌 게 아니다. 한국과 미국 주식시장의 동조화까지 무너졌다. 지난 4일 코스피가 지정학적 우려로 12% 폭락했을 때 미국 증시는 끄떡없었다. 오히려 그날 다우존스 지수는 238포인트 올랐고, S&P500과 나스닥도 각각 0.78%, 1.29% 반등했다.
한국은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나라다. 유가가 오르면 무역수지가 악화되고, 물가가 뛰고, 기업 비용이 늘어난다. 반면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이다. 유가 상승은 미국 에너지 기업에 오히려 호재다. 실제로 S&P500 안에서 에너지 업종은 3월에만 18% 이상 올랐다. 엑슨모빌 같은 대형 에너지 기업이 그 수혜를 직접적으로 받았다. 같은 전쟁 유가가 한국에는 독이고, 미국에는 약이 된 것이다.
이문희 한국은행 물가통계팀장은 “2월 원/달러 환율은 하락했지만, 미국과 이란의 긴장으로 국제 유가가 오른 영향으로 원화 기준 수입 물가가 전월 대비 1.1%, 전년 동월 대비 1.2% 상승했다”고 말했다.
두바이유 월평균 가격이 1월 배럴당 61.97달러에서 2월 68.40달러로 10.4% 뛰었고, 미국의 이란 공습이 시작된 2월 28일 이후 3월 중순까지는 58.6% 폭등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은 기록적이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3월 한 달간 코스피에서 32조131억원을 순매도했다. 지난달(2월) 21조599억원을 팔아 월간 사상 최대를 기록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3월 30일 하루에만 2조1,332억원을 내다 팔았고, 이날로 8거래일 연속 순매도를 이어갔다.
김석환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코스피에서 외국인이 하루 1조원 이상 순매도한 날이 올해 22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연속 1조원 이상 순매도도 7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매도의 83%는 반도체에 집중됐다. 외국인은 3월에 삼성전자를 15조5590억원, SK하이닉스를 6조3190억원 팔아치웠다. 두 종목 합산 21조8780억원이다. 여기에 구글이 '터보퀀트'라는 새로운 양자컴퓨팅 기술을 발표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까지 겹쳤다.
지난 27일 삼성전자는 4.22%, SK하이닉스는 5.47% 빠졌다. 지난 25일 기준 공매도 잔액은 16조974억원으로 사상 처음 16조원을 넘어섰다. 주가가 더 떨어질 것으로 보는 투자자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강진혁 신한투자증권 선임연구원은 “이번 주 외국인 코스피 현물 순매도액이 10조원을 넘어서는 등 매도 강도가 매우 높다”며 “미국의 이란 전략시설 타격 여부를 둘러싼 경계감과 AI 기술 이슈까지 매도 재료로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외국인이 팔아치운 물량을 받아낸 건 개인 투자자들이다. 3월 한 달 동안 개인은 코스피에서 약 31조원을 순매수했다. 반도체 대형주와 레버리지 ETF를 중심으로 저가 매수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주가를 지탱할 수는 있어도, 환율까지 방어할 힘은 없다.
민경원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국제유가 상승이 달러 강세로 이어지고, 원화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고환율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며 "환율이 안정되지 않는 한 외국인 자금 유입은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외국인이 주식을 팔면 달러를 사서 나가야 하니 환율이 오르고, 환율이 오르면 환차손 부담에 외국인이 더 팔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구조다.
다음달 원/달러 환율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배당금 달러 환전 수요(약 11조원 규모)까지 겹쳐 환율 변동성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은행은 중동 전쟁이 물가를 끌어올리고 성장을 둔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기준금리를 적어도 8월까지 연 2.50%로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상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AI 투자 기대 속에 연초 이후 외국인 보유 비중이 높은 대형주 중심으로 주가 상승 폭이 확대됐고, 이에 따른 기존 보유 물량 정리가 전체 순매도 흐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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