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인공지능 시대, 예술과 인간의 실존을 묻다
조선규의 문제 핵심. 조선규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신체라는 가장 오래된 미래는 물리적 인공지능 시대, 예술과 인간의 실존, 그리고 몸의 언어가 기술의 언어와 만나는 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근 공연예술 현장에서는 예술가들이 물리적 인공지능, 체화된 인지, 감각 운동 통합과 같은 기술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트렌드 추종이 아니라, 신체와 움직임이라는 본질적 문제가 기술의 언어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자, 역으로 기술이 예술의 철학적 질문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화면 속 정보 처리를 넘어 실제 공간을 인식하고 균형을 잡으며 스스로 행동하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물리적 인공지능이 던지는 공학적 질문은 무용과 퍼포먼스가 탐구해 온 "몸이란 무엇인가", "움직임은 단순한 위치 변화인가, 의미를 낳는 사건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정확히 겹쳐진다. 기술은 지금 이 질문을 공학의 언어로 제기하고 있고, 예술은 다시 그 질문을 인간 실존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개념이 바로 '체화된 인지'다. 인간의 사고는 뇌만의 독립적 작용이 아니며, 몸을 통해 공간을 열고 세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이는 로봇공학자들이 마주한 '모라벡의 역설'로도 증명된다. 고도의 계산은 기계가 빠를지언정, 낯선 물체를 부드럽게 쥐거나 불규칙한 지면을 걷는 물리적 작업에서는 인간 유아가 로봇을 압도한다. 몸은 단순한 실행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도의 지성이 집약된 현장인 셈이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예술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선명해진다. 데이터에 기반한 상업 예술은 AI와 협업하겠지만, 순수 예술은 "그것이 어떤 삶과 감각에서 나왔는가"를 묻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고수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술이 인간을 바라보는 기준의 변화다. 로봇의 정확도를 인간의 표준으로 내면화할 때, 흔들리고 지치는 인간의 몸은 ‘불완전함’이라는 낙인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그 약함과 불균등함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의미를 만들어낸다. 기계적 정밀성이 인간 평가의 척도가 된다면, 비정형적인 몸을 가진 이들은 사회적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창작은 효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 주저, 우회라는 비효율 속에서 깊어진다. AI는 가장 빠른 답을 찾지만, 예술은 "왜 이 표현이 지금 나에게 불가피한가"를 끝까지 묻는 과정이다. 로봇공학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움직일 것인가를 고민할 때, 예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의미 있는 몸짓과 감정의 연결을 연구해 왔다. 과학이 몸을 이해하려 할수록 예술이 축적해 온 신체의 지식은 더욱 중요해진다.
미래는 가장 새로운 기술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미래는 가장 오래된 것, 곧 몸 안에 있다. 신체는 낡은 것이 아니라 아직 다 설명되지 않은 인간 지성의 현장이며, 예술은 그 몸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끝까지 묻는 작업이다. 기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움직이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잘 움직이는 것과 잘 살아내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인가." 이 질문을 놓지 않는 한, 예술은 여전히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미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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