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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유는 표정관리, 석화는 살얼음판…호르무즈발 '극과 극' 비상경영

헬륨(중동 의존도 64.7%)이나 브롬(97.5%) 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들은 중동 외 지역에서 단기에 대체 물량을 확보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사태 장기화로 인한 정유·석화 공장 가동 중단이 반도체와...

정유는 표정관리, 석화는 살얼음판…호르무즈발 '극과 극' 비상경영

LG화학 여수 NCC 공장 전경. (사진제공=LG화학)

[뉴스웍스=안광석 기자] 호르무즈 해협 재봉쇄 등 중동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하면서 국내 정유와 석유화학 업계 간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정유 업계는 유가 급등에 따른 재고 평가 이익으로 1분기 ‘어닝 서프라이즈’가 확실시되면서 ‘횡재세(Windfall Tax)’ 압박이라는 역설적 상황에 놓였다. 반면 기초원료인 나프타 수급이 끊긴 석유화학 업계는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가시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유·석화 업계의 경우 어느 산업군보다도 중동 정세에 민감하다. 따라서 정부의 긴급 자금 지원 및 주요 기업 실적 공시가 예정돼 있는 다음주부터 이달 말까지가 이들의 중장기 생존 여부를 가늠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15일 석화 업계에 따르면 오는 20일 정부의 공급망 안정화 기금 집행이 시작된다. 이는 나프타 수급 난항을 겪는 기업들에 물류비와 대체 수입선 확보를 위한 금융 지원이 현장에 도달하는 실질적인 기점이다.

정부는 최근 6783억원 규모의 나프타 수익 단가 차액 지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원료 고갈에 따른 관련 업계의 셧다운 확산을 막기 위해 집행 속도를 최대한 높인다는 방침이다.

이달 27~30일에는 SK이노베이션 및 에쓰오일(S-Oil), LG화학 등 주요 기업들이 1분기 실적을 공개하며 시장의 심판대에 오른다. 비슷한 시기 정부에서는 산업통상자원부 주재로 에너지 수급 비상대책회를 통해 비축유 추가 방출 규모와 나프타 관세 면제 연장 여부 등 국가 차원의 장기 대응 전략을 확정한다.

해당 이벤트들은 업계의 운명을 가를 전환점이 되겠지만, 현재 정유·석화 각 기업이 처한 내부 사정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장부상 이익에 시달리는 정유 업계와 실질적 원료 고갈에 직면한 석화 업계 현주소는 비상경영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기엔 그 간극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정유 업계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살얼음판 위의 잔치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1분기 정유 4사(SK이노베이션·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GS칼텍스)의 합산 영업이익이 최대 5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긍정적 분석이 지배적이지만, 정유 업계에는 오히려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익명의 정유 업계 관계자는 “1분기 실적은 아마도 유가 급등으로 과거 저가에 사둔 원유 가치가 오른 장부상 이익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며 “이를 두고 횡재세 운운하는 것은 과도하다 본다”고 말했다. 국내 정유·석화 업계 주요 수입유인 두바이유 가격은 전쟁 직전 배럴당 70달러 선에서 최근 108달러를 돌파하는 등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에 따라 정유사들은 이달 말 실적 발표에서 이익 규모를 강조하기보다는 추후 유가 하락 시 닥칠 재고평가 손실과 물류비 상승에 따른 경영 불확실성을 피력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관측된다.

여천NCC 2공장 전경. (사진제공=DL케미칼)

석화 업계는 정유 업계와 달리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다.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의 모태인 나프타 공급이 사실상 차단되면서 국내 주요 나프타 분해시설(NCC)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이미 LG화학은 여수 NCC 2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여천NCC와 롯데케미칼 등도 불가항력을 선언하거나 가동률을 대폭 낮췄다.

나프타 재고가 임계치 아래로 떨어지면서 현재 국내 석화 업계 평균 가동률은 60%대까지 급락한 상황이다. 더욱이 대체 수입선 물량이 실제 공장에 도착하기까지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석화 업체들은 정부 지원금의 현금화보다 나프타를 실은 선박이 부두에 접안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게 현실적이라는 반응이다.

전 세계 원유의 25%가 오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감이 장기화할 경우 국내 산업 전반의 구조적 타격이 불가피하다.

정유·석화 업계 비용 충격만 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무역협회와 산업연구원 최신 분석에 따르면, 해협 봉쇄가 3개월 이상 지속되는 구조적 공급 충격 단계에 진입할 경우, 제조업 전체 생산비는 최대 11.8% 급등할 전망이다. 특히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석유제품(82.9%)과 화학제품(14.8%)의 타격이 극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순한 유가 상승보다 더 큰 위협은 핵심 소재의 수급 불능이다. 헬륨(중동 의존도 64.7%)이나 브롬(97.5%) 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들은 중동 외 지역에서 단기에 대체 물량을 확보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사태 장기화로 인한 정유·석화 공장 가동 중단이 반도체와 자동차 등 국가 주력 산업 도미노 셧다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근거다.

즉, 현재의 정유사 흑자는 일시적 착시일 뿐이고, 석화사가 직면한 원료 고갈은 국내 제조 공급망의 가장 약한 고리를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익명을 요청한 에너지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이달 말 실적 발표와 비상대책회의는 각 기업과 정부가 단순 비용 보전을 넘어 실물자원 확보형 공급망으로 체질을 개선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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