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7일 시행된 정보통신망법에는 허위정보와 조작정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이 법은 “타인의 인격권이나 재산권 또는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보”로서 허위정보 혹은 조작정보인 줄 “알았음에도” “손해를 끼칠 의도 또는 부당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그 정보를 유통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특히 최대 5배에 달하는 가중 손해배상 규정이 화제가 됐는데, 이 법(시행령)이 돈으로 혼내려는 대상은 “사실이나 의견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로서 구독자 10만 혹은 월 조회수 10만을 넘긴 자로 한정돼 있다.
법이 누구의 어떤 마음과 행동을 규율하려는지와 별개로, 이 법이 제시한 허위정보와 조작정보 개념은 법적 정의를 넘어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현재의 공론장을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할 때 환기할 가치가 있는 화두다.
우선 허위정보는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가 허위인 정보”다. ‘허위’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꾸민 것”이라고 정의돼 있다. 그럼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이다.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이다. 따라가면 허위정보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실제로 있었거나 현재에 있는 것인 양 전부 혹은 일부를 꾸민 정보”다.
이 정의는 읽는 이를 잠시 흠칫하게 한다. ‘사실’이란 무엇인가? 허위정보는 기준이 되는 사실이 확정돼 있어야 비로소 성립할 텐데, 이 복잡한 세상에 사실이 어디 있는가? 있다. 과학적 사실이 아닌 (이 법도 준거로 삼는) 법적 사실의 선언으로서 확정판결이다. 물론 법이 규율하려는 것은 잠정적 지식의 불완전성이 아니라 악의적 허위지만, 공론장의 토론에서는 그 불완전성이야말로 중요한 문제다.
허위정보 개념은 그 정보를 담은 진술의 형태 문제를 환기한다. ‘허위’는 사실을 가리키려는 것이 분명한 진술에 붙일 수 있는 꼬리표다. “경제성장률 1%”는 허위 여부를 다툴 수 있지만, 쇼츠에서 “경제성장률이 1%밖에 안 돼?”라고 게릴라식으로 물으면 당장은 퇴로를 확보하며 1초 안에 ‘1%’를 입력시킬 수 있다.
한편 조작정보는 “내용을 사실로 오인하도록 변형된 정보”다. 위에서 시도해본 국어사전적 허위정보의 정의에 이미 “꾸민 정보”라는 표현이 있지만 법은 이 부분을 조작정보로 다룬다. 문제는 어떤 ‘꾸밈’이냐일 것이다. 우선 각 조각 정보들은 참이지만 다 모아놓고 보면 전혀 다른 정보를 은연중에 전달하는 짜깁기가 있다. 허위정보 위에 참인 정보로 당의정을 입힐 수도 있다. 어떤 정보는 맥락이 제거돼 유통될 때 문제가 된다.
이 법은 풍자를 규율 대상에서 제외한다. 하지만 풍자가 풍자로 이해되는 사회적 맥락을 떠나 ‘공유 버튼’을 통해 일반 공중에게 노출됐을 때, 공중은 오해할 수 있다. 풍자 자체가 현상을 뒤트는 지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넘어 큰 그림에서 보면, 세상은 논쟁으로 가득하다. 과학에서 패러다임이란 어떤 사실의 조각들을 특정한 관점에 따라 배열해 하나의 정합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원리이다. 문제는 한 패러다임에서는 (잠정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다른 쪽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비판받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과학적 지식은 과학계 내에서 검증받지만, 정치화된 지식은 그와 달리 참으로 자주 법정을 드나든다.
과학은 영원히 사실에 다가가는 활동이지만, 법원은 무엇이 사실인지 지금 판단을 내리고 논쟁을 닫아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종의 사실이 공론장에서 진영에 의해 동원될 때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은 토론으로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법은 일종의 ‘성역’도 선언하고 있다.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유통한 정보를 진실이라 믿었고, 그 믿음에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지지 않도록 규정했다. 생각의 자유를 위한 올바른 접근이면서, 자신마저도 속이는 유포자에게는 강력한 피난처다. 법은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지만 판결은 성역 밖에 서서 믿음을 형성한 과정을 보고 누군가에게 “당신의 믿음에는 상당한 이유가 없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믿음도 사회적이다.
이 법이 악의적 허위조작정보 유포자로부터 공론장을 방역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대신 이 법의 파생적 가치는 자발적인 공론장에서 허위와 조작의 본질에 대해 시민들이 숙고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다. 법은 수용의 태도는 말하지 않는다. 법이 자제하는, 법을 넘어서는 모호한 영역에 시민의 책무가 있다.
최태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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