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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재정·통화는 이미 썼다…남은 건 ‘기업 규제 개혁’뿐

삼성전자는 125조원의 현금을 은행에도 못 맡기고 채권시장으로 내몰렸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투자 재원을 마련하러 미국 자본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한국 기업이 한국에서 마음껏 뛰지 못하는 나라. 그 역설이...

재정·통화는 이미 썼다…남은 건 ‘기업 규제 개혁’뿐

[대한민국 신성장 전략 특별기획 : 대통령의 칼날은 ‘암반 규제’를 깰 수 있을까①]

대통령의 칼날은 '암반 규제'를 깰 수 있을까. 그래픽=박명규 기자

2025년 한국 경제성장률은 1.0%. 역대 최대 추경을 쏟아부었고 반도체 두 회사가 버텨준 결과다. ‘반도체 투톱’을 걷어내면 사실상 마이너스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40년대 잠재성장률이 0% 내외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성장 엔진이 꺼져가고 있다는 경고다.

그런데 같은 시기 국회에서는 기업을 옭아매는 규제 법안이 19개월 만에 149건이 새로 쌓였다. 한쪽에선 성장률이 무너지고, 다른 쪽에선 족쇄가 늘어났다. 삼성전자는 125조원의 현금을 은행에도 못 맡기고 채권시장으로 내몰렸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투자 재원을 마련하러 미국 자본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한국 기업이 한국에서 마음껏 뛰지 못하는 나라. 그 역설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은 규제합리화위원회가 출범했다. 역대 정권마다 규제 개혁을 외쳤지만 현장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이번엔 다르다고 한다. 대통령이 직접 메스를 들었다. 진짜 자를 수 있을까. 기업들은 말보다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3월 5일 제8회 임시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범준 한국경제신문 기자

경고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6%에서 0.8%로 추가 하향 조정했다. 0.8%포인트 하향 조정은 한국은행 경제 전망 역사상 최대폭이었다. 결국 연간 성장률은 1.0%로 마감됐다. KDI는 2026년 현재 잠재성장률을 1%대 중반으로 추정하며, 2040년대 후반에는 0% 내외까지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숫자 안을 들여다보면 더 불편하다. 설비투자는 반도체를 제외한 부문이 전반적으로 부진하고, 건설투자는 지방 부동산경기 침체로 바닥을 기고 있다. 미국의 대한(對韓) 관세율은 협상 타결 이후에도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수출 전선도 녹록지 않다.

‘투자→고용→소득→소비’로 이어지는 내수 선순환이 끊겨 있다. KDI는 현재의 낮은 성장률이 경기 순환적 측면에 일부 기인하지만 보다 장기적으로는 잠재성장률이 빠르게 하락하는 데 기인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돈을 퍼붓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올리비에 블랜차드는 재정 확대와 통화 완화가 단기 부양에는 효과적이지만 구조 개혁이 수반되지 않으면 잠재성장률 하락을 막을 수 없다고 반복적으로 경고해 왔다.

727조9000억원 규모의 슈퍼 예산을 편성한 이재명 정부가 규제합리화위원회를 동시에 띄운 배경이 여기에 있다. 재정은 시간을 살 수 있지만 구조를 바꾸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 대통령이 내놓은 답 중 하나가 규제합리화위원회다.

2월 19일 행정규제기본법 개정으로 기존 규제개혁위원회를 규제합리화위원회로 격상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전환했다.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신설·강화되는 모든 규제는 이제 이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2013년 4월 19일 도쿄 일본기자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이며 '아베노믹스'를 설명하는 모습. 일본의 장기 불황(잃어버린 20년) 탈출을 위해 내세운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는 양적완화, 재정확대, 성장전략이라는 3개의 '화살'로 구성돼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아베노믹스 vs 이재명노믹스 비교. 그래픽=박명규 기자

아베노믹스의 데자뷔

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면 이유가 있다. 2013년 1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며 ‘세 가지 화살’을 선언했다.

금융 완화, 재정 확대, 그리고 구조 개혁. 첫 번째 두 화살은 날아갔다. 엔화가 급락했고 닛케이 지수는 치솟았다. 그러나 세 번째 화살, 즉 기득권 규제 장벽을 허무는 구조 개혁은 끝내 온전히 날지 못했다.

각 성청(省廳)이 총리 권고를 형식적으로 수용하면서 실질적으로 무시하는 관행이 반복됐다. 일본의 명목 GDP는 아베노믹스 기간 오히려 쪼그라들었고 실질임금은 12년간 하락했다.

이재명노믹스와 아베노믹스의 구조적 닮은꼴은 외신이 먼저 포착했다. 2025년 7월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코스피 5000 시대를 열겠다”며 주식시장 플레이어들을 ‘우군’으로 삼으려는 정책이 아베 전 총리가 2012년 말 재집권한 뒤 추진한 경제정책과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재정 확대, 주식시장 부양, 청와대 중심 경제 운용으로의 전환이라는 세 축이 겹친다. 기획재정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분리해 청와대의 경제 컨트롤타워 기능을 강화한 것도, 30조원 국민성장펀드와 20조원 한국형 국부펀드 출범도 아베 정권의 관저 주도 경제 운용과 구조적으로 닮았다.

아베 정부는 규제개혁회의를 총리가 직접 90여 차례 주재하며 농업·의료·노동의 암반 규제를 깨는 데 총리 권위를 쏟아부었다. ‘암반 규제’란 이해관계가 너무 깊이 뒤엉켜 역대 어느 정권도 손대지 못하고 굳어버린 규제, 바위처럼 단단한 기득권의 장벽이다.

농협 독점 해체, 국가전략특구 내 의료 규제완화, 보육 서비스 규제 철폐가 그 산물이었다. 규제합리화위원회는 이 모델을 더 강화한 형태다. 위원장이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다. 부처가 권고를 무시하려면 대통령의 뜻을 정면으로 거슬러야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기업 총수들이 2월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청년일자리와 지방투자 확대를 위한 기업간담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김범준 한국경제신문 기자

22대 국회 발의 기업규모별 차등규제 현황, 최근 10년 기업부담지수(BBI) 변화, 항목별 기업 규제부담지수 추이.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러나 구조적 한계는 같다. 이익집단과 관료 저항의 이중벽이다. 규제합리화위원회의 권고가 산업통상부, 고용노동부 등 개별 부처의 저항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실질적 성패를 가를 것이다.

여기에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집단 규율 집행 강화를 예고하고 있어 규제완화와 대기업 규제 강화라는 두 방향이 정부 내에서 어떻게 조율될지도 뇌관으로 남아 있다. 한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경로를 시차를 두고 따라가고 있다는 담론은 이제 경고가 아니라 현실 진단에 가깝다.

고령화, 저성장, 부동산 양극화, 청년 고용 빙하기. KDI는 생산연령인구 감소 등 인구구조 변화가 잠재성장률 하락 요인으로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이 2026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이 시점에 규제합리화위원회는 단순한 행정 기구가 아니라 구조 전환을 위한 마지막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돋보기]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 3인. 그래픽=박명규 기자

‘부총리급 3인방’, 규제 개혁의 실험대에 서다

‘재벌 저격수’, ‘보수 경제학자’ 그리고 ‘삼성맨’을 한 테이블에 모았다. 박용진 전 의원은 초선 시절부터 삼성을 겨냥해 재벌 개혁을 외쳐온 인물이다. 상법 개정, 감사위원 분리 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국회에서 가장 강하게 밀어붙인 사람 중 하나다.

그가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 앉은 것은 이재명 정부 실용주의 인사의 상징이자 동시에 정교한 정치 계산이다. ‘재벌 저격수’가 기업 친화적 규제완화에 손을 들어주면 진보 진영 내부의 반발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박 부위원장이 어떤 규제에 어떻게 손을 드느냐가 위원회의 정치적 무게를 결정할 것이다.

이병태 KAIST 명예교수는 시장 원리에 가장 충실한 보수 경제학자다. 노동시장 유연화, 기업 규제 철폐, 자유시장 확대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경제 책사로 불렸던 그가 이재명 정부의 규제 합리화 작업에 합류한 것은 야권의 비판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포석이기도 하다. 규제완화의 논거를 가장 강하게 밀어붙일 인물이다.

남궁범 에스원 고문은 삼성전자에서 30년을 보낸 기업인 출신이다. 이론이 아니라 현장의 언어로 규제 문제를 다룰 수 있다. 대기업이 실제로 어떤 규제 앞에서 멈추는지 투자 결정이 어느 지점에서 막히는지를 몸으로 아는 사람이다.

이론·현장·입법 설득력을 갖춘 삼각 편대다. 대통령의 의도는 명확하다. 이념이 아니라 결과로 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실제로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철학이 다른 세 사람이 소상공인·노동계·금융 기득권이라는 첨예한 이해관계 앞에 섰을 때 어떤 결론을 내느냐가 위원회의 실질적 작동 여부를 가른다.

역대 규제개혁 기구들이 ‘좋은 사람들의 좋은 의도’로 출발해 기득권의 벽 앞에서 멈춘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위원회 출범은 선언이다. 진짜 시험은 첫 번째 ‘암반 규제’에 손을 댈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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