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거인의 유산-6 디테일 정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사장단 회의록 최초 공개
사우디아라비아 쥬베일 산업항 건설 현장에서. 김명호 편저 《건설자 정주영》 (삼련서점 서울) 89쪽.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겉보기에는 완전해도 세부 사항에서 문제점이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1%가 나머지 99%를 좌우한다는 뉘앙스도 담겨 있다. 디테일은 품질의 ‘최종병기’인 셈이다. 정주영은 호방하면서도 치밀했다. 법률신문이 단독 입수해 공개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사장단 회의록>을 통해 그의 또 다른 면을 들여다본다.
사장이 품질 각서라도 받고
설계는 한 회사에서 하라
컨테이너 하우스 출입구 발판
도금 처리가 형편없더라
전반적으로 잘 만들었는데
후진국 제품처럼 보인다
도금을 왜 외부에 맡기나
1984년 7월 9일 현대그룹 사장단 회의. 정주영 회장은 미국에서 컨테이너 하우스를 수주한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에 문제를 제기했다. 컨테이너 하우스는 화물 운송용 철제 상자에 창문과 문을 낸 후 단열·방수·냉난방 시설을 추가해 사람이 거주할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이다.
정 회장:
공장에 갔을 때 컨테이너 하우스 출입구 발판을 봤습니다. 아연 도금 처리가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어디서 했냐고 물어보니 외부에 맡겼다고 하더군요. 현대중공업에 도금 공장이 있는데 왜 굳이 외부에 맡깁니까?
발언이 이어졌다. “우리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외부에 맡겨서 형편없이 해요? 컨테이너 하우스는 전반적으로 잘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입구 발판 하나 때문에 조잡해 보입니다. 후진국 제품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내에서 협력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외부에 맡겨서 결과물 전체의 격을 떨어뜨리는 건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넘어갈 수도 있는 발판을, 정 회장은 제품의 품격을 결정짓는 핵심으로 봤다.
정 회장은 제품만 살피지 않았다. 전방위 레이더를 가동했다. 1984년 8월 27일 사장단 회의. 현대정공의 내부 관리 실태가 안건에 올랐다.
정 회장:
현대정공은 내부 관리를 좀 더 철저히 해야 합니다. 밖에 쌓아놓은 컨테이너 플랜트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공장 안은 엉망입니다. 작업자들이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어요. 머리끝에서부터 작업복, 신발 하나까지 회사가 신경 써야 합니다. 본사가 관심을 갖고 내부까지 잘 관리하도록 하세요.
1984년 10월 1일 사장단 회의. 정 회장은 한국도시개발(현 HDC)이 지은 주택의 문제점을 말했다.
정 회장: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은 한국도시개발의 주택 품질입니다. 현대건설보다 한참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렇죠? 그런데 팔 때는 ‘현대 아파트’ 이름으로 팔고 있죠? 그건 회사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겁니다. 이익이 얼마나 나는가보다 더 중요한 건 회사의 신용이에요.
시공 오류로 인한 신용 추락의 파급력도 언급했다. “하자를 돈으로 따지면 몇 푼 안 되는 것 같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떨어지는 공신력은 엄청납니다. 특히 주택은 소비자인 주부들 입에서 입으로 퍼집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빠릅니다. 불만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어요. 한국도시개발 사장이 직접 나서든, 현대건설의 협조를 받든, 철저하게 다시 점검하세요. 각서를 받아서라도 품질을 확실하게 보장하세요.”
결함 해결 방안도 말했다. “한국도시개발 설계사무소를 현대건설에 합치세요. 여기저기서 따로 설계하지 말고 한 곳에서 하세요. 한국도시개발은 시공, 판매, 영업에 집중하면 됩니다. 하자가 생기는 건 설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사 현장 효율화 방안도 나왔다. 방화재와 미장 작업이 먼저 거론됐다. 방화재는 화재 발생 시 연기의 확산을 차단하는 자재다. 미장은 건축 공사에서 벽, 천장, 바닥에 흙이나 시멘트를 바르는 일이다.
정 회장:
방화재를 완벽하게 써야 합니다. 사용자가 불을 내더라도 방화재 탓이 나오면 안 됩니다. 우리가 먼저 전문가에게 자문해서 완전한 방화재를 쓰도록 하세요. 벽돌을 쌓고 미장하는 방식도 이제 효율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요즘은 좋은 건축 자재가 많이 나옵니다. 턱턱 붙이면 끝나는 자재도 많아요. 그런데 여전히 옛날 방식을 그대로 쓰고 있어요. 급진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다음은 PC 공법이었다. PC 공법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뒤 현장으로 운반해 조립하는 방식이다.
정 회장:
재래식으로 시공하는 게 더 비쌉니다. 그런 방식에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앞으로는 동서산업이 PC 공법을 해야 합니다. 전자공장 현장에 PC 공법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가동하도록 해봅시다. 이것을 대외 건축의 한 희망, 한 단계 전진으로 보고 있어요. (동서산업은 1975년 현대건설 토목사업부에서 분리된 건축 자재 기업이다.)
PC 공법을 쓸 때 보여주기식 작업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무슨 잭킹(Jacking)을 하느냐에 따라 복잡해지는데, 괜히 거창하게만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잭킹이 필요해도 최소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워서 해보세요.” 잭킹은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거나 밀어내는 기계 장치인 ‘잭(Jack)’을 사용하는 작업이다.
공정표를 개선하라고도 말했다. “모든 현장 공정은 말이죠. 작대기 쭉 그어놓는 식으로 하지 마세요. 아직도 우리는 20년 전 공정표를 그대로 써요. 건축은 건축대로, 토목은 토목대로 공정표를 만들어서 전부 그래프 용지에 표시해 주세요. 하나가 해결되면 다음이 진행돼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지시하는 형태로요. 자재는 자재대로, 장비는 장비대로 모든 자원과 인력이 공정표에 따라 배치돼야 합니다.”
국내 현장이 해외보다 세심함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국내에서 공정표를 내놓으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 내놓습니다. 줄만 쭉 그어놓은 종이밖에 없어요. 국내도 해외처럼 모든 현장이 공정표를 제대로 내놓을 수 있도록 하세요. 해외에서는 중동 불경기를 잘 극복하고 있는데, 국내는 오히려 후진하는 느낌이에요.”
정 회장은 충실한 교육을 디테일 완성의 바탕으로 봤다. “반도체 공장은 질이 정말 높아야 주문하는 쪽에서 신뢰하고 주문할 수 있어요. 미국의 어느 공장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여야 합니다. 똑같은 반도체 공장 설계인데도 캘리포니아 공장과 우리나라 공장이 천지 차이예요. 미국 사람 시켰더니 정말 잘하더라 이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도 가서 봤잖아요. 보고 와서 그만큼 못 만드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감독자 교육을 더 철저히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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