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이슈프리즘] 아레나, 30년 기억 축적하는 토포필리아로

최근 많은 자치단체장들이 아레나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 개발 논리로 말한다. 몇 만석 규모, 몇 조원 개발 효과, 부동산 가치 상승 등이다. 정작 그 아레나를 찾을 팬과 시민의 시선은 없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할 것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슈프리즘] 아레나, 30년 기억 축적하는 토포필리아로

▲ 우정권 K-컬처콘텐츠산업협회 이사장·단국대 교수

최근 많은 자치단체장들이 아레나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모두 개발 논리로 말한다. 몇 만석 규모, 몇 조원 개발 효과, 부동산 가치 상승 등이다. 정작 그 아레나를 찾을 팬과 시민의 시선은 없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할 것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팬의 감각과 기억이 빠진 입지 논의는 결코 최적지를 찾을 수 없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에서 '관촌'을 감나무 그늘, 장독대 냄새, 개울물 소리, 흙길의 촉감으로 기억한다. 이것을 지리학자 이푸투안(Yi-Fu Tuan)의 '토포필리아(Topophilia)'로 설명할 수 있다. 장소는 물리적 좌표가 아니라 감각의 누적이다. 소리, 음식 냄새, 풍경, 거리의 촉감 등이 하나로 종합될 때 비로소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매디슨 스퀘어가든이 뉴욕의 상징이 된 이유는 빌리 조엘 장기 공연, 복싱 명승부, NBA 플레이오프가 수십 년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철골 구조물이 아닌 "한 번은 가봐야 할 곳"으로 기억한다. 도쿄돔 역시 고라쿠엔, 호텔, 상점가, 놀이시설이 결합돼 공연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라 하루를 '보내는 곳'이 됐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걷고, 머물고, 다시 찾을 이유가 공연장 바깥에 있다. 앞으로의 아레나도 단순 공연장이 아니라 기억이 축적되는 장소로 설계돼야 한다.

반면 국내 논의는 여전히 허허벌판형 개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CJ 라이브시티(LiveCity) 가 흔들린 이유가 공연장 이전에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걷고 싶은 거리도, 밤의 풍경도, 생활 기반도 부재했다. 송도와 영종은 공항 접근성은 좋다. 그러나 공항이 팬 순례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잠실은 입지가 뛰어나지만, 기존 스포츠 기억이 너무 강해 새 아레나 정체성이 종속될 위험이 있다. 그밖에 하남, 광명 등 다른 후보들 역시 장소 철학보다는 개발 계획이 앞선다.

좋은 아레나 입지의 판단기준은 집단 기억이 축적될 조건을 갖추어 놓았는가가 돼야 한다.

첫째, '반복 가능한 생활 동선'을 갖춰야 한다. 공연있는 날만 사람이 몰리고, 끝나면 비워지는 장소는 공연장일 수 있어도 '성지',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토포필리아는 되지 못한다.

둘째, '복합 체류 구조'를 갖춘 곳이어야 한다. 팬들은 실제로 공연 2시간보다 전후 4시간을 기억한다. 광장, 상업시설, 보행 거리, 녹지, 야간 경관, 대형 쇼핑몰, 문화체험 집적지, 호텔 등 숙박시설이 모두 유기적으로 결합돼아 한다. 공연 전후의 시간들이 곧 장소만의 기억으로 축적된다.

셋째, '기술과 문화가 만나는 융합조건'이다. 아레나는 AI 콘텐츠 미디어, 실감형 콘텐츠, 디지털 결제 등이 결합된 복합 인프라여야 한다. 첨단 산업 생태계와 인접하고, 문화와 기술의 융합 실험이 가능한 환경이어야 한다.

넷째, '미래 스토리텔링의 여백'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스피어(Sphere)'처럼 새로운 스토리를 써 내려갈 수 있는 여백이 있어야 한다.

이들 조건이 가장 부합되는 곳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레나의 자리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자체 개발계획이 아니라 콘텐츠 산업 종사자와 팬, 시민의 적극적 개입이다. 콘텐츠 전문가, 팬덤 단체, 연예기획사, 공연 제작자, 플랫폼, 시민 단체 등이 함께 나서야 한다. "어디에 지을까"보다 "어떻게 팬과 시민의 기억이 쌓이는 장소로 설계할까"를 먼저 물어야 한다. K-팝이 세계 1등이라면서, 왜 K-팝 성지 논의는 건설사와 지자체가 주도하나. 거꾸로다. 콘텐츠가 중심이어야 한다.

한국이 지어야 할 것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30년 뒤에도 다시 찾는 '기억의 도시'다. 아레나는 지을 수 있지만 성지는 복합문화도시의 긴 세월 속에서만 태어난다. 훗날 수백만의 '아레나 수필'에는 이런 문장이 담겨야 한다.

"그날 그 광장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그 거리의 밤공기가 코 끝에 알싸하게 전해오던 것을 기억한다", "20년 뒤 아이 손을 잡고 다시 그곳을 찾아, 그때 앉았던 의자에 다시 앉아 보았다". 그런 장소가 바로 아레나 토포필리아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