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경영권을 둘러싼 표 대결이 주주총회를 앞두고 초박빙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번 주총은 단순한 이사 선임을 넘어 이사회 주도권 자체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특히 국민연금이 의결권 ‘미행사’를 결정하며 한발 물러서자, 그간 최대 변수로 꼽히던 축이 빠지면서 승부의 향방은 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양측 지분 격차가 2%포인트 안팎에 불과한 상황에서, 표심은 자연스럽게 약 15%에 달하는 소액주주로 이동하는 흐름이다.
결국 주총 직전까지 누가 이 표심을 끌어오느냐에 따라 이사회 구도가 뒤집힐 수 있는 만큼, 양측의 막판 설득전도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최근 노조를 중심으로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의 경영 참여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번 분쟁은 단순한 지분 경쟁을 넘어 국가 산업안보를 둘러싼 논쟁으로도 번지고 있다.
이사회 재편이 승부처…‘5인 vs 6인’ 선임안 정면 충돌
19일 고려아연에 따르면,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고려아연 정기주주총회가 오는 24일 개최된다.
이날 고려아연은 △제52기 연결 및 별도 재무제표 △정관 일부 변경의 건 △ 이사회 재편△감사위원회 위원 선임의 건 △이사 보수한도 승인의 건 등의 안건을 올린다.
이번 주총의 핵심 안건은 이사회 재편이다. 신규 이사 선임 규모에 따라 경영권 향방이 갈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는 총 19명이다.
이 가운데 직무가 정지된 4명을 제외하면 15명이 실제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중 최윤범 회장 측이 11명, 영풍·MBK 측이 4명으로 구성돼 있다.
다만 이달 임기 만료로 이사 6명이 퇴임하면 구도는 크게 달라진다. 단순 계산으로 최 회장 측은 11명에서 5명으로 줄고, 영풍·MBK 측은 4명을 유지하면서 양측 격차는 1명으로 좁혀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려아연 측은 ‘이사 5인 선임안’을 제시했다. 신규 5명만 선임할 경우 과반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반면 영풍·MBK 연합은 ‘이사 6인 선임안’을 상정했다. 신규 이사 6석을 모두 채울 경우 확보 가능한 의석 수가 늘어나면서 이사회 구도를 뒤집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사 후보는 △최윤범 회장 사내이사 △황덕남 이사회 의장 사외이사 △월터 필드 맥랠런 기타비상무이사 △박병욱 기타비상무이사 △최연석 기타비상무이사 △최병일 사외이사 △이선숙 사외이사 등 7명이다.
고려아연 측은 최 회장과 황덕남 이사를 재선임 후보로 추천했다. 월터 필드 맥랠런 기타비상무이사는 미국 합작법인 크루서블JV가 추천한 후보다.
나머지 4명의 후보는 영풍·MBK 측이 추천했다. 양측 우호 지분 역시 최 회장 측 약 40%, 영풍·MBK 연합 약 41% 수준으로 박빙이다. 여기에 약 5%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어, 의결권 행사 방향에 따라 이사회 주도권이 결정될 전망이다.
의결권 자문사, 최윤범 손…실적·ESG·지배구조 ‘성과’ 반영
이 같은 이사회 주도권 경쟁 속에서 투자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의결권 자문사 권고다. 특히 국민연금과 주요 자산운용사들이 의결권 행사 시 자문사 의견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아, 표심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활용된다.
우선 현재 국내외 의결권자문사들의 권고는 최윤범 회장 측에 유리한 양상으로 파악된다. 19일 현재 고려아연 정기주총 의안 분석 보고서를 발표한 자문사는 글래스루이스,ISS, 서스틴베스트, 한국ESG연구소, 한국ESG평가원, 한국의결권자문, 한국ESG기준원 등 7곳이다.
이 가운데 글래스루이스, 서스틴베스트, 한국ESG연구소, 한국ESG평가원, 한국의결권자문 등 5곳은 고려아연 측이 추천한 이사 후보인 최윤범 회장과 황덕남 사외이사(이사회 의장)에 대해 모두 찬성을 권고했다.
이들 중 한국ESG연구소를 제외한 4곳은MBK파트너스와 영풍 측이 추천한 박병욱, 최연석, 최병일, 이선숙 후보 4명 전원에 대해 반대를 권고했다.현 경영진 중심 이사회 체제 유지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주총 핵심 안건인 이사 선임 규모와 관련해서도 자문사 의견은 일치했다.7곳 모두 고려아연 측이 제안한 '이사 5인 선임안'에 찬성을 권고했고, MBK·영풍 측의 '이사 6인 선임안'에는 반대를 권고했다. 오는 9월 개정 상법 시행에 따라 고려아연은 분리선출 감사위원 1명을 추가로 선임해야 한다.이사 6인을 모두 선임하면 감사위원 선출이 어려운 구조다.
이에 따라 자문사들은 개정 상법 취지를 반영한 5인 선임안에 힘을 실었다. 이처럼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 대부분이 현 경영진 중심의 이사회 체제에 사실상 손을 들어주는 의견을 낸 까닭은 최윤범 회장을 포함한 현 경영진이 그동안 실적과 지배구조, 주주환원, ESG 등 여러 측면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낸 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사상 최대 매출액과 영업이익, 44년 연속 연간 영업흑자라는 유례없는 성과를 달성했다.또한 미국 정부 등과 함께 약 11조원을 투자해 아연과 구리(동), 은, 안티모니 등 핵심 광물을 생산하는 대규모 제련소를 현지에 짓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로 고려아연은 세계 최대 핵심 광물 시장 중 하나인 미국을 선점하고 글로벌 핵심 광물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배구조도 대폭 개선했다.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도록 정관을 바꿨고, 이사회 내 위원회를 모두 사외이사로만 구성해 이사회 독립성과 감독 기능을 강화했다.
영풍, 적자·환경 리스크 부각…수익구조 취약성도 변수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풍은 장기 실적 부진과 환경 리스크가 주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영풍의 2025년 별도 기준 매출은 1조 1927억 원으로 전년 1조 533억 원 대비 증가했지만 영업손실은 2777억 원으로 확대됐다.
영풍은 2021년 728억 원, 2022년 1078억 원, 2023년 1424억 원, 2024년 884억 원에 이어 5년 연속 영업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실적 부진의 배경으로는 석포제련소를 둘러싼 환경 이슈가 지목된다. 석포제련소는 폐수 유출과 무허가 배관 설치 등 물환경보전법 위반으로 58일간 조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토양정화명령 미이행과 통합환경허가 조건 위반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이에 가동률은 2025년 1~9월 기준 40.66%로 전년 대비 12.88%포인트(P) 하락했다.
사업 구조 역시 취약 요인으로 꼽힌다. 2025년 3분기 기준 영풍의 제련부문 매출 중 아연괴 비중이 81%에 달해 단일 품목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제련수수료 하락과 아연 가격 약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구조가 수익성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에서는 양사 간 실적 격차와 환경 리스크가 이번 주총 표심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국내 의결권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는 최근 고려아연 주총 의안분석보고서를 통해 "최근 3년간 회사와 영풍의 경영성과를 비교해 보면, 회사는 매출 성장과 안정적인 수익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영풍은 매출 감소 및 수익성 부진이 지속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서스틴베스트는 "이를 고려할 때 영풍·MBK측이 경영권을 확보할 경우 경영 전략의 연속성과 전략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실행 안정성이 충분히 확보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현 시점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영풍은 19일 입장문을 통해 “고려아연 주주총회의 본질은 특정 계열사와의 과거 실적 비교가 아니라, 소수주주로서 경영대리인에 불과한 최윤범 회장 중심의 왜곡된 지배구조 문제와 주주가치 훼손에 대한 판단”라며 “영풍의 실적을 주요 변수로 언급하는 것은 사안의 본질과 무관한 프레이밍”이라고 반박했다.
국민연금 사실상 ‘중립’ 선언…소액주주 15%가 캐스팅보트
이사회 주도권을 둘러싼 표 대결이 초박빙 양상으로 흐르면서, 시장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캐스팅보트’로 꼽히는 국민연금으로 쏠리고 있다. 다만 국민연금은 사실상 '중립'을 선언하면서 표 대결은 양상 더욱 안갯속으로 빠진 상태다.
국민연금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는 지난 19일 회의를 열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이른바 ‘미행사’는 찬성과 반대 비율에 맞춰 표를 나누는 방식으로, 특정 진영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사실상의 중립 결정으로 해석된다.
수책위는 최 회장과 황덕남, 박병욱 이사 후보에 대해서는 기업가치 훼손이나 주주권익 침해 이력 등을 이유로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봤다.
반면 김보영·이민호 감사위원 후보에 대해서는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현재 지분 구도를 보면 영풍·MBK 연합 측 우호 지분은 약 41% 수준, 최윤범 회장 측은 약 39%로 추정된다.
양측 격차는 2%포인트 안팎에 불과한 상황이다. 당초 국민연금의 선택에 따라 표 대결의 향방이 크게 좌우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중립 결정이 내려지면서 승부는 한층 예측하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약 15%에 달하는 소액주주 표심이 국민연금 대신 캐스팅보트로 부상한 상태다. 양측 모두 주주총회 전까지 의결권 확보를 위한 설득전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산업안보 이슈로 비화한 경영권 분쟁…공급망·고용 논쟁 격화
지난해 2월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장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는 고려아연 노조원들의 모습
표심 향방이 예측 불가능한 초박빙 구도로 흐르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번 경영권 분쟁을 단순한 지분 경쟁을 넘어서 산업·지배구조 이슈로 확장해 해석하는 시각도 커지고 있다.
이번 경영권 분쟁은 지난 2024년 하반기 영풍이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 지분 확보에 나서면서 촉발됐다. 이후 공개매수와 경영협력 계약 등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이에 맞서 기존 경영진이 방어에 나서면서 갈등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올해는 주주총회를 앞두고 이사회 진입을 둘러싼 표 대결이 본격화됨에 따라, ‘사모펀드 중심 경영 체제’로의 전환 가능성이 커지면서 그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MBK파트너스가 과거 인수 기업에서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 중심의 경영을 이어온 전례가 재조명되면서, 단기 수익 중심 전략이 반복될 경우 기업 경쟁력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 같은 우려는 노동조합의 반발로 이어지고 있다. 고려아연 노동조합은 지난 17일 성명을 통해 영풍·MBK 연합의 경영권 확보 시도를 ‘투기자본의 침탈’로 규정하며, 고용 안정과 생산 기반 훼손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노조는 특히 MBK파트너스의 과거 홈플러스 인수 사례를 언급하며 경계 수위를 높이고 있다.
자산 매각과 구조조정 중심의 경영이 반복될 경우 기업 경쟁력과 고용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제2의 홈플러스 사태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는 상태다.
홈플러스는 MBK파트너스가 2015년 약 7조원을 들여 인수한 이후 점포 매각과 자산 유동화를 통해 투자금 회수에 나선 사례로, 일부 점포 폐점과 인력 구조조정이 병행되며 고용 불안 논란이 확산됐다. 업계에서는 이 과정에서 장기 투자 여력이 약화되며 기업 경쟁력이 저하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와 함께 고려아연이 보유한 전략광물 생산 역량의 가치도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갈륨·게르마늄 등 전략광물은 글로벌 공급의 상당 부분을 중국이 차지하고 있어, 미국과 유럽이 공급망을 중국 밖으로 재편하려는 대표적인 자원으로 꼽힌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고려아연은 반도체와 방위산업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탈중국 공급망 구축의 핵심 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MBK파트너스가 조성한 펀드에 중국 국부펀드 자금이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략광물 공급망과 산업안보 측면에서의 우려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 노조는 정부를 향해 국가기간산업 보호 필요성을 제기했다. 노조는 “고려아연의 제련 기술과 신사업 역량은 국가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라며 “투기자본이 경영권을 확보할 경우 기술 유출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산업안보와 노동자 생존권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정책 개입을 촉구했다.
더퍼블릭 / 홍찬영 기자 chanyeong8411@thepub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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