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사신문 윤은기 칼럼니스트] 일론 머스크의 X(옛 트위터)를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들이 실시간 AI 번역 기술을 속속 내놓고 있다. 인류는 지금 ‘제2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대역사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어를 익히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제로화시키는 혁명이다.
이 경이로운 초연결 시대에 역설적으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행위인 ‘필사(筆寫)’가 주목받고 있다. 필사 교본이 베스트셀러가 되는가 하면 필사 동호회도 늘어나고 있다. 성경이나 불경을 매일 필사하는 사람도 있고 인문학 고전이나 명언을 필사하는 사람도 있다. 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필사를 하고 있을까?
AI 번역은 언어장벽의 마지막 빗장을 푸는 도구다. LLM(거대언어모델) 기반의 AI는 단순한 단어 치환을 넘어 문맥과 문화적 뉘앙스까지 포착하며 ‘언어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있다. 외국어 습득에 쏟던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이제 창의적 기획과 전략적 소통에 더 많이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언어장벽이 사라졌다고 해서 상호이해의 깊이가 저절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불거진 ‘문해력 저하’는 심각한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
AI가 매끄러운 번역문을 내놓지만, 그것을 읽는 인간의 사유가 얕다면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간의 진심을 놓치는 ‘신문맹’이 될 뿐이다. 문장의 행간에 숨은 통찰과 화자의 철학을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은 번역기술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문해력’에서 나온다. 깊은 통찰은 언어의 껍데기가 아닌, 그 속에 담긴 영혼을 마주할 때 비로소 잉태된다.
이런 맥락에서 필사는 AI 시대의 한계를 보완하는 가장 강력한 ‘사유의 방어선’이자 ‘창조적 훈련’이다. 번역된 정보는 눈으로 스치면 소멸하지만, 손으로 옮기면 뇌에 각인된다. 필사는 정보를 단순한 ‘데이터’에서 나만의 ‘지혜’로 변환시키는 연금술이다.
필사는 저자의 호흡을 따라가는 가장 겸손한 공부법이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단어의 온도를 느끼고 문장의 구조를 체득하며, 무너진 문해력을 다시 세울 수 있다. 필사는 한자 한자 써내려가는 깊은 명상이다. 디지털 기술로 세상과 넓게 연결하되, 필사라는 아날로그 행위로 나 자신과 깊게 연결해야 한다. 이 두 축이 만날 때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통찰력이 완성된다.
이제 ‘어떻게(Language)’ 전달할 것인가는 AI의 몫으로 넘어갔다. 인간의 승부처는 ‘무엇을(Content)’ 담을 것인가로 옮겨왔다. 개인은 다양한 지식을 융합하는 폴리매스(Polymath)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 매일 단 한 문장이라도 고전이나 명언을 필사하며 나만의 철학적 기둥을 세워야 한다. 언어의 보호막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번역이 아닌, 본질을 꿰뚫는 따뜻한 메시지다.
과거의 바벨탑이 인간의 오만으로 무너졌다면, AI가 세우는 새로운 바벨탑은 상생과 협력의 상징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탑을 지탱하는 단단한 벽돌은 우리 각자가 다진 깊은 사유와 문해력이 될 것이다. 자동번역이 세상을 하나로 묶어줄 때, 우리는 다시 펜을 들어 그 연결의 의미를 종이 위에 새겨야 한다.
“AI기술은 소통의 길을 닦고, 필사는 소통의 영혼을 채운다.”
칼럼니스트 프로필
윤은기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영학 석사, 인하대학교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공무원교육원 원장(차관급),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 총장, 서울시공무원면책심의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협업발전포럼 회장, 대한민국 백강포럼 회장, 백소회 회장, 공군정책발전자문위원장, 도산애기애타지도자아카데미 학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방송활동으로 KBS 제1라디오 ‘생방송 오늘’, EBS TV ‘직업의 세계’, MBN TV ‘알기 쉬운 경제이야기’ 등이 있다. 주요저서로는 <X경영(2025)>, <협업으로 창조하라(2015)>,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매력이 경쟁력이다(2009)>, <時테크 시간창조의 기술(1992)>, <정보학 특강(1987)> 등이 있다.
수상경력으로 ‘공군을 빛낸 인물(2015)’, ‘대한민국공군전우회 자랑스러운 공군인(2015)’, ‘제9회 한국HRD대상 CHO부문 대상(2011)’, ‘홍조근정훈장(2009)’, ‘산업교육대상 명강사부문(199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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