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출발해 56개 매장·500명 시민 목소리로 결실
용인특례시가 올해 3월 한국공정무역마을위원회로부터 '공정무역도시' 공식 인증을 받으며,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인구 110만 대도시가 윤리적 소비와 연대의 가치를 시정의 핵심 지표로 삼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이 인증서 뒤에는 지난 6년간 "인증이라는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과 실천"이라며 묵묵히 발로 뛴 시민 캠페이너들의 땀방울과 용인만의 전략이 숨어 있다.
2020년 밸런타인데이, '공정'의 화두를 던지다
용인에 공정무역의 씨앗이 떨어진 건 2020년 2월 14일, 세상이 온통 달콤한 초콜릿 향기로 가득하던 밸런타인데이였다.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하며 초콜릿 상자를 주고받을 때, 용인의 한 생협 교육장에는 지역 카페 운영자, 생협 활동가,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모여 조금 '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건네는 이 초콜릿은 어디서 왔을까. 이것을 만든 이의 노동에도 달콤한 대가가 지불되었을까."
시대의 공기도 무거웠다. 마이클 샌델의 이 한국 사회를 강타하며 우리가 믿어온 '공정'의 민낯을 들춰내고 있었다. 엎질러진 감염병의 공포 속에 전 세계가 서로의 연결망이 얼마나 취약한지 실감하던 그때, '나의 소비가 누군가의 생존이 된다'는 자각이 용인 시민들을 깨웠다. 그 질문들이 포개지는 지점에서 '용인공정무역네트워크'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첫발을 뗐다.
그날의 질문은 메아리로 끝나지 않고 실천이 되었다. 한국공정무역마을위원회의 '공정무역도시' 인증을 받으려면 ▲ 조례 제정 ▲ 제품 판로 확대 ▲ 민관협력기구 구성 ▲ 교육 및 캠페인 ▲ 커뮤니티 내 실천이라는 5가지의 엄격한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2020년 출범한 '용인공정무역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 까다로운 기준들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첫 단추는 단단한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일이었다. 시민들의 끊임없는 제안과 설득 끝에 2021년, 마침내 '용인시 공정무역 지원 및 육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다.
샌델이 던진 '공정'에 대한 질문에 용인시가 '제도'로 답한 첫 순간이었다. 이어 2022년에는 더 체계적인 조직인 '용인 공정무역 협의회'로 외연을 확장하며, 5가지 요건을 내실 있게 채워나갈 본격적인 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획일성 넘어 일상으로, 공정무역을 지탱한 힘
용인 공정무역 협의회는 특정 단체나 개인 중심의 화려한 플레이를 지양했다. 대신 참여하는 모든 구성단체의 마음을 모으고 방향성을 맞추는 데 끈기 있게 집중했다. 연대와 협력의 정신 자체가 용인 공정무역의 가장 강력한 정체성이 된 배경이다.
여기에 체계적인 시민 캠페이너 교육이 더해졌다. 교육을 받은 시민들은 수동적인 소비자에 머물지 않았다. 직접 시민 교육을 기획하고 현장 캠페인을 주도하며 능동적인 공정무역 운동의 주체가 됐다.
운동의 외연도 넓어졌다. 단순히 먼 나라의 공정무역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용인시가 가진 자산과 결합했다.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도시재생지원센터 등과 손을 잡았고, 공정여행 '마을로'와 협력해 '공정무역과 함께하는 공정여행'을 진행했다.
특히 용인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의 맥을 잇는 '산모롱이 갤러리'의 마순관 도예 명장을 찾아간 활동은 공정무역을 우리 지역의 삶으로 연결하는데 깊은 울림을 남겼다. 제3세계의 생산자들이 만든 수공예품이 공정무역의 중요한 축인 것처럼 우리 전통을 지키는 국내 장인들의 정직한 노동 역시 공정무역이 추구하는 가치와 다르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지구 반대편의 공정무역을 넘어 국내 생산자와 문화 장인들을 보호하는 한국형 공정무역 인증 제도의 고민도 필요하다"는 화두를 찾기도 했다.
배움은 단순한 일회성 교육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찾아가는 공정무역 교실'을 통해 용인백현중학교와 송전중학교, 흥덕고등학교의 청소년들을 폭넓게 만나며 윤리적 소비의 지평을 넓혀온 결과다.
이러한 교육의 힘은 흥덕고등학교 사회적협동조합 '흥덕쿱'이 지난 2025년 12월 용인특례시 '제1호 공정무역 커뮤니티' 인증을 획득하는 기념비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특히 학부모 모임, 용인시청소년미래재단 진로서포터즈 등 성인 대상 교육이 다각도로 펼쳐지는 가운데, 청소년들이 주도해 온 흥덕쿱의 성과는 용인 공정무역의 밝은 미래를 증명하는 확고한 지표가 되고 있다.
교실에서 광장으로, 일상을 파고든 연대의 힘
시민들의 일상에 스며들기 위한 현장 캠페인 역시 치열했다. 용인시장을 비롯한 지역 축제는 물론, 용인시청 중앙 로비에서 공무원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정무역의 가치를 전파했다.
특히 2025년에는 관내 공정무역 가게들과 시민들을 연결하여 따뜻한 '티파티(Tea Party)' 형식의 행사를 진행, 골목 상권 홍보와 가치 확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여기에 지구 반대편 커피 노동자의 고단함을 알리고 한 해 동안 애쓴 용인 시민들에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선물한 '공정무역 커피차' 활동은 현장에서 단연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일상 속으로 파고든 용인의 공정무역은 이미 시민들의 삶 가까이에 든든한 둥지를 틀고 있다. 2025년 12월 말 기준, 용인 관내에는 생협과 대형 카페 등을 포함해 총 56곳의 공정무역 가게가 활발히 운영 중이다. 기흥구, 수지구, 처인구 등 용인 전역에 촘촘히 들어선 이 매장들은 시민들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윤리적 소비에 동참할 수 있는 일상의 거점이다.
시민의 '목소리와 요구'로 인증의 문을 열다
시민들이 묵묵히 뿌린 씨앗이 제도적 결실로 이어지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분수령은 2025년 9월 용인특례시 의회에서 개최된 '용인 공정무역 토론회'였다. 민관이 머리를 맞댄 이 자리에서 행정과 의회를 움직인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름 아닌 캠페이너들이 현장에서 발로 뛰며 수집한 시민 500명의 생생한 '목소리'였다.
용인 공정무역 협의회가 제시한 현장 설문조사 지표는 압도적이었다. 공정무역 필요성 공감 72%, 공정무역 교육 필요성 78%, 제품 구매 의향 65%라는 수치는 공정무역이 몇몇 활동가의 외침이 아닌 용인 시민의 보편적 요구임을 증명했다. "시민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고 원하고 있다"는 현장의 정당한 데이터는 인증이라는 형식적 절차를 넘어 실질적인 '공정무역도시 용인'을 출범시키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다.
커뮤니티 다각화와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
공정무역도시 인증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용인의 진짜 여정은 이제부터다. 2026년 3월의 공식 인증은 결승선이 아닌 새로운 출발선이며, 이제 용인은 안팎의 고정관념을 깨고 상생의 외연을 넓혀야 하는 숙제를 마주하고 있다.
첫째는 일상의 거점이 될 '공정무역 커뮤니티(실천기관)의 전방위적 확대'다. 1호인 흥덕쿱의 성공 모델을 발판 삼아, 관내의 더 많은 학교, 종교시설, 공공기관, 시민사회 단체를 공정무역 커뮤니티로 견인하여 실천 주체를 촘촘하게 늘려가야 한다. 개별점으로 존재하는 외곽의 공정무역 카페들과 도심의 실천 기관들을 하나의 그물망처럼 연결해 110만 시민의 생활 모세혈관 속에 공정무역이 스며들게 하는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둘째는 최근 국내에서 논의가 시작된 '로컬 페어트레이드(Local Fair Trade)'에 대한 프레임 전환이다. 로컬푸드와 공정무역의 결합을 단순히 '지역 농산물과 해외 원료를 섞는 상품 개발' 수준에 가둘 필요는 없다.
공정무역 카페가 지역 농민의 판로가 되어주는 '공간의 융합', 제3세계 노동인권과 우리 지역 농민의 땀방울을 함께 존중하는 '담론의 상생'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반드시 물품의 물리적 결합에만 얽매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릴 때, 비로소 더 창의적인 지역 공동체(커뮤니티)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셋째는 글로벌 첨단 도시의 위상에 맞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의 다각적 융합이다. 이는 기업에 일방적인 시혜적 동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과 거래하기 위해 공급망의 윤리적 기준을 증명해야 하는 관내 대기업들에, 용인의 탄탄한 공정무역 인프라는 가장 훌륭한 '글로벌 ESG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사내 카페 도입이나 기업 단위의 커뮤니티 인증을 통해 기업 임직원들까지 윤리적 가치소비의 주체로 포섭하는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6대 주체(시민·청소년·학교·기업·행정·의회) 거버넌스를 완성하며 이뤄낸 인증이지만, 결국 이 운동을 지속하는 힘은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에서 나온다. 거창한 사회 운동이 아니어도 좋다. 나를 위한 소비가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삶을 지키고, 우리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의 손을 잡고 우리 동네 공정무역 가게로 '공정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커피 한 잔, 초콜릿 한 조각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공정한 향기가 가득 담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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