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의 서막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보물). 1565년(명종 20) 중종 계비 문정왕후(1501~1565)가 명종의 만수무강과 왕비의 후손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이다. 회암사의 낙성에 맞춰 조성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심의겸·김효원의 사사로운 갈등서 비롯됐다는 동인·서인의 양분
문정왕후·윤원형의 ‘외척정치 폐단’ 청산 놓고 조정 격론 벌어져
당쟁 배경엔 전대의 적폐 ‘청산 방법론’을 둘러싼 정치 노선 충돌
16세기, 선조 대 초반 온 조정이 시끄러웠다. ‘이조전랑’이라는 자리에 임명될 인물을 놓고 벌어진 갈등 때문이었다. ‘이조전랑’은 이조의 정5품관인 정랑과 정6품인 좌랑을 통칭해서 부르던 명칭이다. 높은 벼슬은 아니지만 이들은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인사의 실무 전반을 담당하며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처럼 공론을 좌지우지하는 명예로운 관원의 후보 명단을 만들었기에 조정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갈등은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이 김효원의 이조전랑 임명을 반대한 데에서 시작했다. 김효원이 명종 대의 권신인 윤원형의 문객 노릇을 했다는 점을 흠으로 잡은 것이다. 그 뒤 어찌저찌 이조전랑이 된 김효원은, 이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전랑에 천거되자 반대한다. 외척이 이조의 관직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심의겸·심충겸 형제는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들이니 외척 아니냐는 말이었다. 이러한 갈등을 두고 심의겸이 옳으니, 김효원이 옳으니 하며 조정의 의논이 분분히 갈렸다. 심의겸의 집이 도성의 서쪽인 정릉동(현 서울 중구 정동)에, 김효원의 집이 동쪽인 건천동(현 서울 중구 인현동)에 있다 하여 심의겸을 추종하는 이들을 서인, 김효원을 추종하는 이들을 동인이라 불렀다. 동인과 서인으로의 분당, 이렇게 조선 당쟁의 서막이 열렸다.
일제강점기 <한국정쟁지>, 즉 한국 정쟁의 역사를 쓴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는 동서 분당이라는 이 사건을 기술한 후 이렇게 정리한다. “즉, 동서 분당의 명목은 신파가 구파를 대체하려 할 때 발생한, 경쟁에 기초한 감정의 충돌로서, 구질구질한 인신공격으로부터 시작하여 말류의 파도를 젖힌 사적인 다툼인 뿐이었다.” 분당의 이유를 심의겸의 경쟁심에서 비롯했으며 거기에 김효원이 복수하며 발생한 사건이라고 함으로써, 당쟁의 시작을 감정적 이유에서 비롯한 사적인 갈등으로 일축한 것이다(김경래, ‘시데하라 다이라의 한국정쟁지와 조선시대 정치사’).
여기까지 이 이야기는 매우 익숙하다. 양반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 많은데 관직 자리는 부족한 상태, 관직 자리 하나를 놓고, 사사로운 감정이 충돌하여 벌어진 것이 당쟁이라는 이미지. 이야기가 너무 뭉뚱그려진 점이 없진 않지만, ‘팩트’에 어긋난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조정의 다른 관료들이 왜 굳이 심의겸, 혹은 김효원의 편을 들었는가 하는 지점이다.
SBS 드라마 <여인천하> 속 문정왕후(전인화). SBS 제공
그들은 왜 편을 들었을까
강의 때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묻곤 한다. “여기 길동이랑 꺽정이가 심의겸이랑 김효원처럼 싸우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분은 길동이 편, 혹은 꺽정이 편을 들며 바로 패싸움을 시작할 건가요?”
학생들 대부분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교실에서 뭔가 서로 감정이 삐끗하여 친구끼리 싸우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친구들의 싸움에 매번 온 반이 참전하여 편을 들어가며 서로 패싸움을 벌이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듯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 역시 사사로운 감정의 대립에서 비롯한 것에 불과했다면, 조정의 관료들이 참전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관여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길동이와 꺽정이가 누가 더 과자를 많이 먹을 것이냐를 두고 싸운다면 그러든지 말든지라고 하겠지만, 수학여행 때 숙식을 함께할 조 편성 기준을 놓고 대립하는 것이라면 나도 한마디 얹지 않겠는가?
심의겸과 김효원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심의겸은 명종 대 윤원형의 집에 김효원이 기숙하며 일했던 전력을 문제 삼았다. 윤원형이 누구인가. 문정왕후의 형제이자 명종의 외삼촌으로, 그 뒷배를 믿고 사화를 일으켜 뜻있는 선비들을 죽인 데다 온갖 부정행위로 재산을 증식해 국고보다 더한 부를 축적했다고 일컬어졌던 인물이다. 과거 급제도 안 한 젊은 선비가 이런 집에 빌붙어 있었다는 것은 윤원형의 권세에 힘입어 출세해보려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훗날 김효원은 과거에 급제한 후, 청렴하고 뜻이 높다는 평을 얻으며 주변에 따르는 이들이 늘었으나, 소싯적 모습을 본 적 있는 심의겸에게는 다 거짓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럼, 김효원은 왜 심충겸을 문제 삼은 것인가? 여기에서는 그가 심의겸·심충겸이 외척이라고 지적한 점을 되새겨봐야 한다. 후사가 없던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선조는 명종과 명종비 인순왕후의 양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선조의 양외삼촌이 된다. 잠깐이긴 해도 인순왕후가 선조의 수렴청정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심씨 집안은 문정왕후나 ‘윤원형화’할 것이라고 의심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안 그래도 이 무렵 심의겸이 사헌부 대사헌을 맡자, 외척에게 너무 권세가 기울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터였다.
결국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갈등이 조정의 거대한 갈등으로 번져나간 것은 이조전랑 자리 같은 작고도 우발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과 근원은 그 이전, 명종 대에 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외척 정치로 인한 각종 적폐를 어떻게 청산해야 하는가라는 방법론의 차이가 조정을 갈라지게 만든 원인이었다.
서울 노원구 태릉에 있는 문정왕후의 묘.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적폐 청산의 격정이 불러온 것
문정왕후가 여전히 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시절, 윤원형은 거칠 것이 없었다. 1545년 을사사화부터 시작하여 정미사화(1547), 기유옥사(1549)까지, 그는 사화와 옥사를 거듭 일으키며 독점적 권력 행사에 방해가 될 만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숙청했다. 명종 초년의 이 사화들에서 희생된 이들은 중종 대 조광조와 그 일파를 숙청하여 큰 충격을 안긴 기묘사화 때보다 훨씬 많았다(이정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이렇게 사람을 많이 죽이고 펼친 정치도 지극히 파행적이었다. 윤원형은 정상적인 관료 체제는 무시하고 뇌물을 받으며 인사를 전횡했다. 그렇게 축적한 재산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남의 노비나 땅을 차지한 건 셀 수도 없을 정도인 데다, 한양 성안에 있는 집만 열여섯 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애첩 정난정도 유명했다. 정처인 김씨를 독살하고 정경부인 자리를 꿰찼다는 혐의를 받던 정난정은 한강의 두모포에서 쌀 두어 섬을 들여 지은 밥을 뿌려 물고기에게 보시하곤 했다(<연려실기술> 명종조 고사본말).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 세상에, 물고기 배 채우는 짓을 거창하게 할 정도로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정난정은 자살했으며 그에 충격받은 윤원형도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았다.
원흉은 사라졌지만, 적폐는 한순간에 청산될 수 없었다. 사화와 옥사로 귀양 가고 죽은 이들을 복권하고 재등용하고, 윤원형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린 이들을 처단해야 했다. 단지 중앙의 인사만 바꾸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각종 사업을 위해 내수사라는 기관을 활용했는데, 내수사가 특히 기승을 부린 지역이 황해도였다. 황해도의 갈대밭은 그 멋진 풍경 때문에 내수사가 탐을 낸 것이 아니다. 이곳의 품질 좋은 갈대는 갖가지 물품을 만들고 한약재로도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원이었다. 갈대밭만이 아니라 이 일대의 간척지 역시 내수사와 당대의 권세가들이 탐내던 땅이었다. 명종 대의 유명한 도둑 임꺽정이 황해도 일대를 휩쓴 데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다(<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폐단은 말단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절에 문정왕후는 아들의 건강과 세자의 탄생을 빌며 내수사의 재원을 동원하여 불화 400점을 제작했다.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으로 그린 화려한 불화는 당대 굶어 죽어가던 백성들의 피로 그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유림은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그녀가 사랑했던 지방의 각종 신사들이나 사찰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문정왕후의 지우를 받던 승려 보우가 머물던 양주 회암사가 대표적이었다. 한때 250여명의 승려가 머물고 경내 규모만 1만여평에 달하던 이 절은 선비들의 방화로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제주목사 변협에게 맞아 죽었다.
부숴버리고, 불태워버리고, 사람을 때려죽일 정도의 이 격렬함은 전대의 적폐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얼마나 극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앙정치의 격렬한 대립 역시 이러한 당대의 분노와 적폐 청산에 대한 열정에서 기인했다. 동서 분당의 역사는 이 적폐 청산의 길이 얼마나 험준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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