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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에세이] 식판 위의 통성명 : 경계가 잔반이 되지 않도록

그런데 생성형 AI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짧은 시간 안에 아이들 눈높이에 꼭 맞는 귀엽고 생생한 캐릭터를 뽑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매주 새로운 식재료마다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를 붙여줄 수 있었고...

[에세이] 식판 위의 통성명 : 경계가 잔반이 되지 않도록

일상 속 영양사의 역할과 순간을 담은 이야기

일기형 에세이 '영양사시대' 현직부문 '최우수상'

■ 정진희 영양사 | 창원 용호유치원

오늘도 나는 급식실 한 켠에 브로콜리를 꺼내 놓았다.

10년 전, 고등학교 잔반통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멈칫했다. 덩치 큰 남학생들이 수북이 남겨온 채소 더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얘들아, 이건 왜 안 먹었니?" 돌아온 대답은 단순했다. "선생님, 이게 뭔지 몰라서요. 안 먹어본 거라 손이 안 가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낯선 것은 경계하게 된다. 경계는 잔반이 된다. 언젠가 더 어린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식재료와 통성명부터 시켜주리라. 그날 잔반통 앞에서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2022년 봄, 유치원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 다짐을 꺼냈다. 급식실 한 켠에 작은 '식재료 탐험대' 공간을 만들었다. 검수를 마치고 깨끗이 씻은 브로콜리를 올려두고, 옆에는 직접 만든 캐릭터 카드를 붙였다. 처음에는 카드 한 장을 만드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런데 생성형 AI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짧은 시간 안에 아이들 눈높이에 꼭 맞는 귀엽고 생생한 캐릭터를 뽑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매주 새로운 식재료마다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를 붙여줄 수 있었고, 아이들은 그 카드 앞에 모여드는 것을 작은 즐거움으로 삼게 되었다. 기술이 내 손을 빌려, 아이들 마음속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들어간 셈이었다. "안녕! 나는 너희 몸속 나쁜 세균을 물리치는 숲속의 요정, 슈퍼 브로콜리야!" 아이들은 달려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브로콜리를 요리조리 뒤집어보며 소리쳤다. "선생님! 진짜 작은 숲 같아요! 여기 나무 있어요, 나무!"그 눈빛이 반짝이는 순간, 나는 알았다.

오늘 저 아이는 브로콜리를 먹을 것이라고.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여름 어느 날, 식판 위에 올라온 노란 참외 조각을 앞에 두고 한 여자아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깎여서 담긴 모양이 낯설었던 것인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날 체험존에는 껍질째 놓인 참외 한 덩이와, 달콤하게 웃는 참외 캐릭터 카드가 함께 있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참외를 손으로 톡톡 두드려보더니, 이내 카드 속 그림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급식 시간, 그 아이가 참외 한 조각을 입에 넣는 순간을 나는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오물오물 씹으며 살짝 웃는 그 표정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식판의 풍경이 달라졌다. 이름을 알게 된 식재료는 더 이상 낯선 덩어리가 아니었다. 잔반량은 전년 대비 37% 줄었다. 비워진 식판이 쌓일수록, 내 가슴에는 다른 종류의 뿌듯함이 차올랐다. 아이들이 남기지 않은 음식만큼 버려지는 것도 줄었다. 작은 식판 하나가 지구에게도 조금은 다정해진 것 같아, 그것도 조용히 기뻤다.

영양사의 일이란 칼로리를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하고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식재료를 소개하고, 그 재료와 친구가 되는 첫 순간을 함께 만들어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이 일을 10년 동안 계속해 온 이유인지도 모른다. 내일은 파프리카를 꺼내볼 생각이다.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오늘 밤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궁리할 것이다.

※ 본 작품은 ‘영양사시대’ 문예 공모전 에세이 수상작입니다.

현직 및 예비 영양(교)사의 시선으로 ‘일상 속 영양사의 역할과 의미’를 담아낸 글로, 대한급식신문과 대한영양사협회가 공동 주최한 공모전(2026. 1. 12 ~ 3. 27)을 통해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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