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함' 강조한 임원 메일, 직원들은 단체 연차
노조 밖까지 번진 파업 열기, 삼성 내부 갈등 고조
[녹색경제신문 = 정창현 기자] 최근 삼성전자 모 사업부 팀장급 임원이 해당 사업부 팀원들을 대상으로 메일 한 통을 보냈습니다. 억새, 달뿌리풀, 갈대는 생김새가 비슷해 구분하기 어렵지만 하나같이 거센 바람과 물살을 버텨낸다, 줄기 속이 비어 있어 유연하게 휘기 때문이다 — 메일은 이 이야기를 꺼낸 뒤 이렇게 끝맺습니다.
"끝까지 남는 힘은 단단함보다 유연함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몸을 낮추고,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마음이 삶을 더 오래 버티게 합니다."
타이밍이 묘했습니다. 노조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진행하던 바로 그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파업'도, '노조'도, '성과급'도, 메일 어디에도 그런 단어들은 없었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달리 읽혔습니다. "유연하게 버텨라"는 말이 때로는 "참아라"로 들리기도 하니까요. 직원들 사이에서는 금세 수군거림이 번졌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라는 말이 결국 파업 자제하라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직원들의 답은 행동이었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파업 예정일을 전후한 날짜별 연차 신청 현황이 빼곡하게 채워졌습니다. 총파업이 예고돼있는 5월 마지막주 화·수·목·금요일, 칸마다 수십 개의 '연차' 표시가 줄줄이 늘어섰습니다. 해당 팀은 갈등의 진원지인 메모리 사업부서가 아닌 걸로 확인됩니다.
댓글도 달렸습니다. "하루만에 투표율 50% 넘은 걸 보면 3만명은 참가할듯", "전세계 최대 인원 파업 참여로 세계 뉴스에 한 번 나겠는데요", "엄청 자랑할 만한 일이다", "실적도 세계 최고, 파업도 세계 최고" 등. 삼성전자가 노사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걸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파업 예고 기간 삼성전자 일부 직원들의 근태 현황
이번 갈등의 뿌리는 성과급입니다. 경쟁사 SK하이닉스가 성과급 상한을 없애고 수조원을 나눠준 것과 비교되면서 삼성 직원들의 박탈감은 더 커졌습니다. '같은 반도체 호황인데 우리만 왜'라는 정서입니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노조는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무려 93.1%의 압도적 찬성률로 쟁의권을 확보했고, 투표에는 재적 조합원 약 9만명 중 73.5%가 참여했습니다.
파업이 현실화하면 영업이익 손실이 최대 9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사측도 합의를 이루기 위해 임금 인상과 자사주 지급 카드를 꺼냈지만 '상한 폐지'에는 끝내 선을 그었고, 협상은 결렬됐습니다.
삼성전자 내부 사정에 밝은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그냥 연차 쓰고 집에 있겠다"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노조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불만이 그만큼 조직 전반에 퍼져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같은 시기, 회사의 대외적 표정은 딴판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110조원 이상의 투자 계획을 담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했고, 정기 주주총회에서 전영현 DS부문장 부회장은 주주들을 향해 "좋은 성과로 주주들에게 보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전 부회장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온도가 너무나도 다릅니다. 임원은 유연함의 지혜가 담긴 메일을 보내고, 직원은 달력에 연차를 채워 넣으며 댓글을 답니다. 말은 오가고 있지만,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갈대처럼 유연하게 버티길 바라는 쪽과, 파업을 통해 원하는 보상을 이뤄내려는 쪽. 이러한 갈등 속에서 110조짜리 성장 계획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그 온도 차가 5월 전에 좁혀질지, 더 벌어질지 지금으로선 알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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