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쏘아올린 ‘ABC그룹 논란’의 후폭풍이 거세다.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22년 대선 패배 책임을 친문 세력에게 돌리면서, 민주당이 깊은 내홍에 빠져들고 있다.
최근 당내 계파 갈등은 이견 조율 과정을 넘어, 당의 주도권과 향후 국정 철학을 둘러싼 전면전 양상으로 비화하는 상황이다. 유 전 이사장의 발언 이후, 최근 정치 복귀를 선언한 송영길 전 대표까지 참전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을 배출하며 여권의 확고한 주류로 자리잡은 ‘친명(친이재명)’계와, 당의 역사적 뿌리와 가치를 자임하는 ‘친문(친문재인)’ 진영 간의 뚜렷한 파열음은 향후 이재명 정부의 국정 운영 방향을 결정지을 중대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송 전 대표는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과정에서 발생한 '돈봉투 살포' 의혹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2심까지 재판받았다. 주요 혐의는 정당법·정치자금법 위반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이다.
1심(서울중앙지법)은 돈봉투는 무죄, 먹사연 불법자금만 유죄로 보고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하며 법정구속했다. 지난 2월 13일 서울고법 형사1부(윤성식 부장판사)는 전부 무죄를 선고하며 1심 실형을 파기했다.
이후 송 전 대표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지난 3일 계양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본격적인 대외 활동의 닻을 올렸다. 그는 여러 언론 매체와 유튜브 채널을 종횡무진하며 친문 세력을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핵심 뇌관은 지난 21대 대선 과정에서의 '친문 태업론'이다. 송 전 대표는 지난 22일 경향신문 유튜브 채널 '경향티비' '인물비상구'에서 2022년 대선 당시 "친문 세력이 이재명 후보 낙선을 바랐다"고 폭로했다.
그는 "제가 친문과 싸우며 당 대표가 됐고, 그게 아니었다면 이재명 후보 탄생도 어려웠을 것"이라며, 친문이 이낙연을 밀기 위해 대장동 사건을 조직적으로 터뜨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보가 된 후에도 친문의 끊임없는 공격 속 머리에 망치테러까지 당했다"며, "지역구 의원들이 선거운동 하나 안 하고 유세차도 숨겼다는 제보가 쏟아졌다"고 밝혔다.
특히 "이재명 반대·저 반대한 친문 상당수가 선거운동 안 했다, 이낙연부터 그랬다"고 강조하며 과거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송 전 대표의 이처럼 수위 높은 발언은 대선 승리와 정부 출범 이후에도 잔존해 있던 계파 간의 앙금을 수면 위로 완전히 끌어올렸다. 최근 친명계를 자극했던 'ABC론'과 맞물려 당내 내전 격화에 불을 지핀 것이다.
이같은 송 전 대표의 발언에, 고민정 의원 등 친문계 인사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정권 초기 산적한 국정 운영의 부담과 책임을 과거 세력에게 전가하려는 전형적인 남 탓 정치”라며, 내부 총질을 멈추라고 격렬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사실 선거 과정에서는 경선에서 떨어진 후보가 마음에 상해서 경선을 통과한 후보를 돕지 않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대선은 물론이고 지역구 총선에서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내용이다. 문제는 차기 당대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송 전 대표가 친문 진영을 향해 뇌관을 쏘아올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송 전 대표의 발언은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이 심상치 않음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3일 채널A에 출연한 구자룡 변호사는 이에 대해 “당내 권력 투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당 일부 인사들 중에는 ‘당내 권력 투쟁’이 거론되면, 그 자체를 외면하거나 누르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구 변호사는 “이제는 민주당 사람들도 당내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설명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송 전 대표가 뇌관을 터뜨린 이유에 대해 구 변호사는 “지금 지방선거에서는 좀 유리한 면이 있고, 그 이후 당권에 대해서까지 연결해 가지고 지금부터 투쟁을 하는 게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송 전 대표가 친문 진영을 향해 쏘아 올린 신호탄의 이면에는, 최근 여권 내 핵심 화두로 떠오른 ‘뉴이재명’ 그룹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송 전 대표는 2월말 복당 직후 조국혁신당 통합 반대파와 친명계 갈등 가운데 “백의종군으로 당 통합”을 강조했으나, 3월 들어 뉴이재명 중심의 당권 강화를 위해 과거 친문과의 악연을 조명한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김어준 씨 등 범여권 인사를 중심으로 ‘뉴이재명 지지층과 전통 친문 지지층’의 대립이 고조된 상황에서, 송 전 대표는 ‘친문이 이재명 안 도왔다’는 불만을 공론화한 것이다. 이처럼 송 전 대표의 발언에는 ‘자신의 공로를 부각하기 위한 의도’가 내재돼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과거 돈봉투 사건으로 민주당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탈당한 만큼, 복귀 후 이재명 정부 뒷받침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다.
송 전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뉴이재명 토론회'에 직접 참석해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뉴이재명' 세력이 내세우는 핵심 목표는 과거 민주당이 얽매여 있던 경직된 이념적 틀과 도덕적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철저한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중도 및 보수층까지 외연을 폭넓게 확장하는 것이다.
현재 야당인 국민의힘이 내부 사정으로 지지율이 하락한 상태에서 합리적 보수의 공간이 비어있는 만큼, ‘뉴이재명’ 그룹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이재명 정부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 동력으로 삼겠다는 고도의 정치 공학적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경제 분야에서는 과거의 분배 일변도에서 벗어나 AI, 반도체 등 미래 산업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와 혁신 성장을 앞세운다. 부동산 정책 역시 과거 정부의 징벌적 조세나 융통성 없는 규제를 과감히 탈피해, 시장 친화적이고 유연한 노선으로 전환을 꾀하고 있다. 아울러 사법 개혁과 검찰 개혁 등 핵심 국정 과제 역시 소모적인 이념 논쟁보다는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용적 성과를 내는 데 집중하며, '유능한 대통령'이라는 브랜드를 강화하려는 포석이다.
반면 친문 진영은 이러한 '뉴이재명' 노선의 실체에 대해 당의 역사적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며 맹비난을 하고 있다. 실용주의와 외연 확장이라는 달콤한 미명 아래, 민주당이 오랜 기간 피 흘려 수호해 온 노동자의 권리, 사회적 약자 보호, 보편적 복지 등의 핵심 진보 가치가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전통적 지지층의 실망과 이탈을 경고하며, 선명성 없는 섣부른 확장은 결국 기반이 취약한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친문 진영은 최근 벌어지는 갈등 국면 전체가 친명계의 '권력 독점'을 위한 의도적인 기획이라고 깊이 의심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필수적인 당내 화합을 도모하기보다는, 과거 주류 세력을 의도적으로 국정 중심에서 배제하고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당내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수사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긍정적 성과마저 깎아내리며 내부를 갈라치기 하는 뉴이재명의 행태는 당내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갈등의 전면에 선 송 전 대표의 강경 행보에는 개인의 정치적 명운과 치밀한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법리스크의 터널을 지나 무죄 입증이라는 강력한 명분을 손에 쥔 그가 가장 확실하고 빠른 정치적 재기 방법으로 ‘현재 권력의 심장부인 이재명 대통령을 강력히 엄호하며 당내 강성 지지층을 결집’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친문 진영을 향한 거침없는 선제공격은 자신의 정치적 선명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이재명 정부 내에서의 확고한 지분과 역할을 요구하는 강력한 무력시위 성격을 띤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 벌어지는 '뉴이재명' 대 '친문'의 대립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나 감정싸움을 넘어, 집권 여당의 향후 노선과 철학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치열한 노선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실용이라는 돛을 달고 더 넓은 중도의 바다로 나아가려는 세력과, 당의 닻을 깊이 내리며 전통적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세력 간의 충돌은 당분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양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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