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안전한 술 없다”는데…되레 “마시자” 주류업계 반격, 그 뒤엔
중앙일보
“건강에 안전한 음주량은 없다”는 게 세계보건기구(WHO)의 경고이지만 주류업계는 술의 사회적·정신적 효용을 앞세워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외로움을 줄여주는 술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면서다. 술을 덜 마시는 시대에 주류업계가 어떤 논리로 생존 전략을 다시 짜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 도쿄 기린홀딩스 본사의 기린 고로. 로이터=연합뉴스
“술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사회에 활력 넣어"
일본 2위 맥주 기업 기린의 미나카타 다케시(南方健志) 사장(COO)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나카타 사장은 최근 도쿄에서 언론 관계자들을 만나 적당한 음주가 주는 정신건강상의 이점을 강조했다. “알코올이 신체에 해를 끼치는 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정신적 관점에선 좋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해당 발언은 알코올을 둘러싼 보건당국의 경고가 수위를 높이는 상황과 맞물려 주목할 만하다. WHO는 알코올이 암 발병 위험과 관련이 있다며 안전한 음주량은 없다는 입장이다. 술을 적게 마시면 위험을 낮출 수는 있지만 위험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적당한 음주의 긍정적 효과를 둘러싼 논의도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주류업계는 알코올 논쟁을 신체 건강의 문제로만 접근해선 안 된다고 맞서고 있다. 고립과 외로움이 사회 문제로 떠오른 만큼 술이 제공해온 사회적 관계 형성의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다. FT는 “지난해 하이네켄의 돌프 판 덴 브링크 최고경영자(CEO)도 사회적 윤활유로써 맥주가 갖는 특성을 강조했다”며 “외로움 등 정신건강 문제가 만연한 이 시대에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맥주의 역할이 공론장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돌프 판 덴 브링크 하이네켄 최고경영자(CEO)가 2023년 4월 20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연례 주주총회에 앞서 손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말로는 알코올의 효용 강조, 실제론 무알코올 확대하는 딜레마
이 같은 주장을 놓고 주류업계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는 시각도 있다. 알코올의 위해성을 부인하기 어려워지자 술의 사회적 효용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알코올을 줄이거나 뺀 제품을 앞세워 소비자를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 주요 맥주 기업들은 술을 마시지 않거나 음주량을 줄이려는 소비자를 겨냥해 저알코올·무알코올 제품군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글로벌 맥주 기업 안호이저부시 인베브, 하이네켄, 기린 등은 각각 벡스 블루, 하이네켄 0.0, 기린 프리 같은 제로 제품을 내놓고 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유지하되 알코올 섭취는 줄이려는 수요를 겨냥한 것이다. 덴마크 맥주 기업 칼스버그가 2024년 영국 소프트드링크 업체 브리트빅을 33억 파운드(약 6조8000억원)에 인수한 것도 기존 주류 시장 밖에서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시도다.
버번 매각하고 비타민 인수…건강회사로 가는 기린
1990년대 후반 알코올 소비가 정점을 찍은 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경우 체질 개선 작업에 훨씬 적극적이다. 기린은 80년대 제약 부문에 진출했던 경험과 발효·생명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사업 중심축을 헬스사이언스(건강과학) 분야로 옮기고 있다. 2023년 호주 비타민·웰니스 브랜드 블랙 모어스를 인수했고 이듬해 일본 화장품·건강식품 업체 판클도 사들였다.
호주 시드니 한 건강식품 매장에 블랙모어스 제품이 진열돼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반면 지난 4월엔 버번위스키 브랜드 포 로지스를 매각했다. 주류 자산 일부를 정리하고 건강 관련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사업 구조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요시무라 도루(吉村透留) 기린 헬스사이언스 부문 사장은 FT에 “우리는 건강회사로 진화하고 있다”며 “이 부문 매출을 2035년까지 50억 달러(약 7조8000억원) 규모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FT는 “기린이 알코올 판매 감소를 상쇄할 만큼 성장 전략을 제때 실행할 수 있을지 시장에선 의문이 제기된다”고 짚었다. 모닝스타의 재키 창 애널리스트는 블랙모어스의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와 기린의 유통 역량을 근거로 헬스사이언스 사업을 낙관적으로 봤다. 그러나 앞서 2020년 기린 주주였던 영국계 투자회사 인디펜던트 프랜차이즈 파트너스(IFP)가 기린 측에 헬스사이언스 진출을 중단하고 맥주 사업에 집중하라고 요구했던 사례 등 부정적 전망도 적지 않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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