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LNG 공급난에 가격 급등
나프타 원료 품목 도미노 파급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유가 충격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호주로 확산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인한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공급 부족은 그 자체로 국제 가격상승으로 이어졌으며 나프타를 비롯한 다운스트림 산업망 전체가 연쇄 파급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한국과 대만에서는 ‘비닐봉투 대란’이 있었고 아시아 전체에서 산업소재, 플라스틱, 고무 등의 생산 차질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원유의 중동 의존도가 특히 높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최근 유럽과 호주,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 정박한 LPG선.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호주로 확산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
●걸프 의존도 높은 아시아 국가들 직격탄
공급 부족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은 곳은 걸프 지역과 가까운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일부 국가는 대규모 비축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이미 휘발유, 경유 등이 급등했고 석유화학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
다른 아시아 국가는 국내 비축량이 적어 즉각적인 공급 부족에 직면했다.
인도 정부는 철강·자동차·섬유·플라스틱 공장 등에 공급되는 액화석유가스(LPG)를 전쟁 이전 수준의 70%로 줄였고, 방글라데시에서는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요소비료 공장 대부분이 가동을 중단해 식량 안보 위기까지 거론된다.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인 인도네시아는 이번 주부터 차량 1대당 하루 연료 구매량을 50ℓ(약 13갤런)로 제한했다.
각국 정부는 연료세 인하와 보조금 지급 등으로 소비자 부담을 낮추고 있지만, 가격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면 수요가 유지돼 공급 부족이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정 여력이 부족한 국가들은 이런 정책을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데, 실제 파키스탄은 전쟁 이전보다 휘발유 가격을 46%, 디젤 가격을 90%가량 인상했다.
●소비재 전반으로 이어지는 가격 상승 도미노
문제는 단순한 원유 부족이 아니라 나프타다.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는 대체재가 거의 없고 비축량도 적어, 일부 아시아 석유화학 기업들은 이미 생산 축소나 ‘불가항력’을 선언한 상태다.
원유와 나프타, 그리고 이를 원료로 하는 중간재의 가격 상승은 다운스트림 산업인 소비재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CIS에 따르면, 아시아 플라스틱 수지 가격은 전쟁 이후 최대 59% 급등했다. 인도에서는 병뚜껑 가격이 4배 뛰었고, 태국에서는 포장용 비닐 가격이 인상됐다.
기업들은 포장재 두께를 줄이거나 종이·유리 등 대체 소재를 검토하고 있지만, 생산라인 변경과 규제 문제로 실제 전환까지는 수개월에서 1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오 플라스틱은 기존 제품보다 최대 7배 비싸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다.
원자재 충격은 글로벌 경제 전체에 부담을 주고 있다. 제조업체들은 에너지와 원재료 비용 상승으로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료, 헬륨 등 중동 의존도가 높은 자재까지 부족해지면서 식품과 전자제품 가격 상승 압력도 커지고 있다.
●일 화학기업들, ‘나프타 원료 제품’ 줄줄이 가격 인상
원유 비축 모범국인 일본에서도 나프타를 원료로 쓰는 화학기업의 제품 가격 인상이 확산하고 있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화학 메이커 쿠라레이는 향료나 세정제, 의약품의 중간 재료로 쓰이는 이소프레놀과 시트랄, 이소발레랄 등을 4월 13일 출하분부터 평균 20% 인상하기로 했다.
유니치카도 엔브렛, 유니필 등 반도체 제조공정 등에서 사용되는 폴리에스터 필름 제품군의 가격을 21일 출하분부터 1kg당 100엔 이상 올리기로 했다.
세키스이화학공업은 5월 7일부터 수도관 등에 쓰이는 폴리에틸렌 관(20%↑), 염화비닐관(12%↑), 밸브(10%↑) 등 인프라 자재 전반의 가격을 20% 이상 올릴 계획이다.
앞서 카네카는 이미 폴리스틸렌 소재 단열재(카네라이트 폼) 가격을 40% 인상했다.
현지 언론들은 현재 상황을 단순한 물가 상승이 아닌’석유화학 대란’으로 규정하고 이들 중간재를 가공해 만드는 최종 제품도 앞으로 가격 인상이 줄을 이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대만, 유가 상승에 ‘비닐봉지 품귀 현상’
한국에서 ‘쓰레기봉투 대란’이 일어난 것과 유사하게 대만에서는 ‘비닐봉주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대만 경제부가 대만 내 350개 상권과 1033개 시장을 조사한 결과, 42개 상권과 284개 시장이 비닐봉지 공급 부족을 호소했다.
정부는 즉각 국영석유기업 대만중유공사(CPC) 산하 제4나프타생산공장의 조기 가동을 통한 공급 확대책을 발표했다.
대만 정부는 이에 따라 비닐봉지 생산량이 월 5000t 이상(약 12억5000여개 비닐봉지 분량)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궁밍신 대만 경제부장(장관)은 나프타 가격이 평균 60% 이상 인상됐지만 정부의 가격 조절로 대만 내 인상 폭은 약 40%에 그쳤다고 설명하면서 새로 생산된 비닐봉지 가격은 2월에 비해 약 30% 인상될 수 있다고 전했다.
●유럽·호주로 번지는 에너지 위기
에너지 위기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호주 등으로 번지고 있다.
유럽연합(EU)에서는 휘발유와 디젤 가격이 각각 15%, 30% 상승했으며 천연가스는 50% 이상 급등했다.
유럽은 약 4억5000만 배럴의 원유 및 석유제품 비축량을 보유해 초기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지만, 비축량이 줄면서 수요를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고 있다.
여기에 일부 유조선들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아시아로 기수를 돌리면서 유럽의 수급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한국무역협회 브뤼셀 지부는 미국 정치 매체 폴리티코 등을 인용해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폐쇄 위협으로 유럽 경제 전반의 타격이 우려된다”고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이란이 허가 없이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대한 공격을 예고하며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함에 따라 세계 석유·천연가스 공급량의 20%가 차단된 상태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EU) 전반에 걸쳐 제조업 생산 차질, 항공편 감소, 식품 가격 상승, 차입 비용 급등, 인플레이션 등의 복합적인 경제적 충격이 가시화하고 있다.
독일 메르츠 총리는 “전쟁이 장기화하면 유럽 경제에 가해지는 부담이 코로나19나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와 유사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과 액화천연가스(LNG) 확보 경쟁이 심화하면서 유럽으로 향하는 에너지 물량이 감소하고 있다.
전쟁 초기 EU는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가 원유 6%, 가스 10% 미만 등으로 비교적 낮아 영향이 적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전쟁이 5주 차에 접어들면서 에너지 공급 안보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반면 전쟁 전 걸프 지역 의존도가 높았던 아시아 국가들이 물량 확보를 위해 입찰가를 높이면서 유연한 계약을 맺은 공급업체들이 수익 제고를 위해 유럽으로 갈 물량을 아시아로 전환함에 따라 유럽 공급이 감소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유럽의 LNG 수입업체 임원은 “호르무즈 해협이 한 달 이상 봉쇄되고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추가 공격이 계속될 경우 장기적인 고유가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고 전했다.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른 유럽 내 제조업 생산비용 상승과 스태그플레이션 재현 가능성도 제기된다.
국제 유가 상승세 지속으로 EU 휘발유 지표인 ‘유로 슈퍼 95’의 가격이 한 달 사이 약 15% 급등했는데 이는 비축유 방출 합의에도 불구하고 산업 전반의 비용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독일 업체 코베스트로가 물류 경로 변경과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비용 부담 증가를 이유로 가격 인상을 예고하는 등 비료, 플라스틱, 반도체 필수 부품인 헬륨 등 가치사슬 전반에서 생산비용 상승과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
EU 집행위원회의 발디스 돔브로브스키스 경제 담당 집행위원은 “현 상황이 1970년대와 유사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으며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도 “경제 회복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본다”고 언급했다.
호주는 국가 연료 재고를 매주 발표하며 사실상 전시 수준 관리에 들어갔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이번 전쟁으로 인한 경제 충격은 앞으로 몇 달 동안 계속될 것”이라며, 산업 부문 연료 우선 공급을 위해 국민들에게 대중교통 이용을 당부했다. 일부 주유소는 한 번에 구매할 수 있는 연료량을 제한하고 있다.
이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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