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의 억센 팔이 젊은 여성의 어깨를 붙잡는다. 공포로 가득한 눈망울은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분)를 향한다. 오디세우스는 끝내 그 눈길을 외면한다. 칼날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가 섬기던 석상의 목도 함께 잘려 나간다. 여신은 사라졌다. 인간은 신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영화 ‘오디세이’에는 신의 개입도 영웅도 없다. 신들과 타협하던 간교한 오디세우스는 사라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평범한 인간만 남았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세계에서 신성(神性)이란 초월적 힘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식과 욕망이 빚어낸 형상이다. 남성은 전쟁을 일으키고 여성은 겁탈당하거나 살해되지만, 영화 속 여성은 피해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오디세우스를 일깨워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때로는 직접 손에 피를 묻힌다.
20년째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앤 해서웨이 분)의 ‘왕비 자리’는 구혼자들을 유인하는 미끼이자 이타카를 지탱하는 유일한 권위다. 아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 분)에게 자신의 정치력이 “네 턱에 난 수염보다 못하냐”고 외치는 장면은 허울뿐인 남성성에 대한 분노다. “평화와 복수 중 무엇을 원하냐”는 물음에 그는 “오디세우스를 원한다”고 답한다. 둘 다 남성들의 정치적 선택지일 뿐, 그는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한 유일한 남성을 원한다.
놀런 감독이 그린 키르케는 오두막에 사는 촌부다. 마법 지팡이로 병사들을 돼지로 만들던 원전과 달리, 이 영화의 키르케는 직접 그들의 머리카락을 뽑고 두개골을 뒤튼다. “그들이 야만적으로 행동할 걸 알지 않았느냐”는 그의 일갈은 오디세우스의 도덕적 알리바이를 무너뜨린다.
루피타 뇽오가 헬레네 역으로 캐스팅됐을 때 사람들은 수군댔다. ‘블랙 워싱’ 논란과 더불어 제기된 불만은 그가 트로이전쟁을 일으킬 만큼 절세미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놀런의 헬레네는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그의 미모는 애초에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 구실이기 때문이다. 승전을 정의라고 부르는 메넬라오스에게 헬레네는 “정의가 아니라 당신 형의 탐욕 때문”이라고 반박하며, 그 고상한 이름 뒤에 숨은 욕망을 지목한다.
칼립소(샤를리즈 테런 분)는 오디세우스에게 망각의 열매 로터스를 먹이는 여인이다. 그는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바닷가 모래밭에 산다. 정신분석가의 상담실처럼 비어 있는 이 공간은 오디세우스에게 잠시 현실을 유예할 시간을 허락한다. 칼립소는 그가 자신의 기억과 죄책감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망각 속에 머물게 한다. 붙잡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돌아가도록 돕는 자, 그것이 놀런이 그린 칼립소의 사랑이다.
마침내 귀향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하나의 문명을 없앴다는 죄책감에 집으로 돌아올 용기를 잃었었다”고 한다. 이에 페넬로페는 자신이 그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답한다. 그 순간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따라다닌 아테나 여신(젠데이아 콜먼 분)이 그가 살해한 트로이 여사제의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죄책감이 만든 형상은 죄를 인정하는 순간 사라지지만, 손에 물든 피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여성을 악녀로 명명하기 시작한 최초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놀런은 그 여신들의 자리에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응징하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여성의 힘을 놓는다. 그들은 남성적 판타지의 대상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인간의 얼굴이다. 망자들을 애도하러 떠나는 오디세우스 곁에 이제 그 폐허를 살아온 페넬로페가 동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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