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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숙적'의 안방에 직접 들어간 한국…한미 원전 딜 막전막후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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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전 르네상스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사진=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1978년 고리 1호기를 지으며 원천기술을 전수받던 원전 후발국이 반세기 만에 원전 종주국 핵심 기업의 지분을 확보합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WEC) 주주 명부에 '팀코리아'가 이름을 올리기로 하면서입니다. 반세기 가까이 기술 종속 논란과 지식재산권 소송으로 얽힌 숙적의 안방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는 대반전입니다.

글로벌 메가 딜의 퍼즐은 지난 여름부터 물밑에서 긴박하게 맞춰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8월 25일자 본지 지면을 통해 '미국 정부가 한국에 웨스팅하우스(WEC) 지분 인수를 제안했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을 당시만 해도 업계 안팎에선 "설마 한국이 WEC 지분을 인수하는 게 정말 가능하겠느냐"는 반신반의가 적지 않았습니다.

보도 직후 한국경제신문에는 사실 여부를 묻는 문의도 쏟아졌구요. 대미투자 프로젝트를 선정하고 총괄하는 산업통상부가 보도 직후 "사실과 다름"이라는 공식 보도설명자료를 배포한 것도 이런 의구심을 키우는 데 한몫했습니다.

마스가 넘보는 마누가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보도는 큰 틀에서 사실이었습니다. 한국 측이 WEC 지분에 투자한다는 큰 틀의 방향성에는 양국이 합의한 것이 맞았습니다. 다만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세부 딜 구조가 기사에 포함되어 있어 불가피하게 '사실과 다름'이라는 표현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업계가 이 딜의 실현 가능성을 쉽게 믿지 못했던 배경에는 깊은 역사적 앙금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국형 원전이 해외로 뻗어나갈 때마다 기술 자립 여부를 둘러싸고 WEC와의 지식재산권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하지만 지난 10월 1일 양국이 공식 발표한 '한미 원전 프레임워크'를 통해 한국이 WEC 주주가 된다는 사실이 확정됐습니다.

협상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당초 하워드 러트닉 장관이 이끄는 미국 상무부는 텍사스 엔시널 가스복합화력발전소 외에도 탄소포집활용저장(CCUS)이나 사용후핵연료 폐기물을 처리할 영구처분장 건설 등 여러 에너지 프로젝트들을 패키지로 들고 와 한국의 투자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협상단은 다른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미국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면서, 한국의 산업 생태계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사업"으로 미국 측의 시선을 돌려세운거죠. 그 해답이 바로 '원전'이었습니다.

사진=미국 백악관 홈페이지

이는 한국 조선업의 경쟁력을 지렛대 삼아 관세 협상을 돌파했던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에 이은 또 한 번의 전략적 쾌거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연이어 원전 행정명령을 발표하며 원전 부흥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지만, 정작 미국 내에서 설계·조달·시공(EPC)을 총괄할 주계약자로서 WEC의 시공 역량은 지난 수십 년간 극도로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원천기술은 있지만 시공 역량이 무너진 미국에 한국의 공급망과 공기 준수 능력은 최적의 대안이었습니다. 미국이 2030년까지 착공하기로 한 신규 대형 원전 10기 중 8기를 한국이 시공과 기자재 공급 등으로 지원하기로 하면서 교착 상태였던 협상의 물꼬가 전격적으로 트였습니다.

마스가 펀드 규모(1500억 달러)에 버금가는 1200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가 원전 사업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국내 원전업계가 강조해 온 '마누가(MANUGA·Make American Nuclear Great Again)' 구상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팀코리아 넘어 팀코러스 된다

물꼬가 트이자 미국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한국에 WEC 지분 인수를 공식 제안해 왔습니다. 이후 협상 막전막후에선 숨 막히는 수싸움이 이어졌습니다. 협상 초기 미국 정부가 지분 20% 가량 인수를 타진하자, 한국 측에서는 대주주 브룩필드(캐나다 사모펀드)가 쥔 경영권 지분 51%를 매입하자는 공격적인 제안까지 나왔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지분 매각을 꺼린 대주주 브룩필드의 반대가 만만치않았다고 합니다.

정부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발을 넓혔습니다. 의결권 있는 보통주 5~10%를 우선 확보하고, 향후 WEC가 상장(IPO)을 추진할 때 기존 지분율 희석을 막고 추가 지분을 챙길 수 있는 신주인수권까지 확보하는 '플랜B'로 방향을 틀어 실리를 챙겼습니다.

WEC의 궤적을 돌아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6년 일본 도시바에 인수됐던 WEC는 한때 파산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캐나다 사모펀드 브룩필드에 헐값으로 매각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구요. 그러나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는 WEC의 몸값을 순식간에 끌어올렸습니다. 기세를 회복한 WEC는 2024년 체코 원전 수출에 나선 '팀코리아'에 지재권 소송전을 걸어왔습니다.

당시 정부도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자 WEC 지분 인수를 타진했으나 조 바이든 행정부의 무반응으로 무산됐습니다. 이후 2025년 1월 체결된 분쟁 타결 협정(SA)은 막대한 로열티 지급, 수출 권역 배분 등으로 인해 국내에서 '불공정 굴종 계약'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2026년 8월 25일자 1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시 맺은 SA를 통해 지재권 분쟁의 불씨를 일단 꺼두었기에,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지분 셰어링 딜'로 판을 키울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WEC와의 법적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봉합해 둔 덕분에 '미국의 원천기술과 한국의 독보적 시공 능력'을 결합하는 '팀코러스(Team KORUS·Korea+US)' 구상이 비로소 협상 카드가 될 수 있었다는 거죠.

이번 딜은 단순한 해외 지분 투자가 아닙니다. SK, 삼성 등 AI 데이터센터 전력 확보가 시급한 민간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재원을 대고, 미국 본토에 한국형 원전(APR1400)을 직접 공급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지재권 논란으로 설움을 겪어야 했던 팀코리아가 오랜 앙금을 털고 이제는 WEC의 주주로서 당당히 안방 문을 열어젖히고 있습니다. '단순 시공 하청'에서 출발해 마침내 미국 원전 르네상스의 키를 쥐고 동등한 '원전 동맹'으로 격상될 수 있을지, 양국의 정교한 셈법 속에서 막을 올린 이 딜의 최종 성패에 전 세계 원전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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