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
최근 광주·전남 지역이 대규모 반도체 산업 유치와 남부권 혁신벨트 구축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급부상하면서 대구·경북이 느끼는 소외감과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지고 있다. 한때 대한민국 첨단 기술과 전자산업을 호령했던 대구·경북이 어째서 새로운 미래 산업의 흐름에서 소외되었는지, 그 산업 재편의 냉혹한 역사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시점이다.
과거 구미전자산업단지는 국가 지도자의 강력한 산업화 의지가 빚어낸 대한민국 산업화의 심장이자 전자산업의 상징이었다. 사통팔달의 교통망과 풍부한 공업용수, 안정적인 전력망을 갖춘 데다 지역 대학들이 전문 인력을 꾸준히 배출하며 산업 생태계를 든든히 떠받쳤다. 1980~90년대 전자산업의 눈부신 성장은 이렇듯 탄탄한 생산 기반과 인재 양성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만들어낸 성장의 동력은 영원할 수 없었다. 1990년대 대구의 미래를 바꿀 기회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경제 위기 앞에 번번이 좌절됐다. 대구 경제의 산업체질 개선을 위해 추진했던 달성 위천국가산업단지 지정은 낙동강 수질 오염을 우려한 부산·경남권의 격렬한 반발에 막혀 무산됐다. 노태우 정부 말기 성서공단에 들어선 삼성상용차는 지역의 새로운 희망이었지만, 김영삼 정부 시절 몰아친 IMF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결국 2000년 삼성상용차가 법정관리와 청산으로 막을 내리면서 지역 경제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구조조정의 칼바람은 2000년대 들어 더욱 매섭게 몰아쳤다. 낙동강 페놀 사태로 지역민의 원성을 샀던 구미 OB맥주 공장이 광주공장으로 통합됐고, 삼성전자의 생활가전 생산 기능 일부도 광주로 이전하면서 지역 산업 재편이 본격화됐다.
여기에 기업들의 투자 전략이 우수 인력과 연구개발 역량을 갖춘 수도권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산업의 무게중심도 빠르게 이동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가 경기도 파주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구축한 데 이어, 수도권 규제가 단계적으로 완화되면서 삼성전자의 모바일과 연구개발 기능 역시 수원과 화성 등 수도권으로 더욱 집중됐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첨단산업을 이끌었던 대구·경북의 제조 기반은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다.
첨단산업의 중심축이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동안 전통 제조 거점이었던 포항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항을 세계적인 철강도시로 성장시킨 POSCO 역시 신규 투자의 중심을 광양과 해외로 분산했다. 이로인해 포항 철강산업단지는 시설 노후화와 친환경 전환 압박, 그리고 글로벌 시황 악화라는 삼중고에 직면했다. 특히 50년 넘게 가동된 핵심 설비들의 천문학적인 교체 비용과 청년 인구 유출로 인한 숙련공 부족 현상은 포항 철강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타격이 되고 있다.
글로벌 산업 패러다임 변화로 가전과 휴대전화 생산기지는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로, 고부가가치 첨단산업과 연구개발 기능은 수도권으로 집중했다. 대기업들은 첨단산업은 우수한 연구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곳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론을 들이민다. 실제로 지역 대학을 졸업한 공학 인재들이 첫 직장으로 수도권을 1순위로 지목하는 인재의 수도권 쏠림은 지역 산업 생태계의 고질적인 빈혈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공장 부지나 전력 같은 물리적 인프라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첨단 인재와 연구 역량이 수도권으로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구조가 고착되면서 대구·경북은 기업을 붙잡아 둘 산업 생태계의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이다.
지역 발전은 결코 통치자 한 사람의 정책적 결단이나 시혜성 선물만으로 지속될 수 없다. 산업을 유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 지역을 떠나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정주 여건을 개선하고, 미래를 이끌 우수 인재를 키우며, 시대 변화에 맞춰 산업 생태계를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단순히 기업을 유치하는 보조금 지원을 넘어, 인재들이 아이를 키우고 문화를 향유하며 머물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이 곧 최고의 산업정책이다.
과거 전직 대통령들이 지역에 남긴 산업 기반은 분명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선물을 안일하게 누리기만 했을 뿐,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 왜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고 성장동력을 어디서 잃었는지를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중앙 정치권력과의 인연과 배려에만 기댄 천수답식 발전으로는 미래를 열 수 없다. 지금 대구·경북에 필요한 것은 변화된 패러다임 속에서 로봇, 모빌리티, 첨단 신소재 등 미래 산업을 스스로 설계하고 경쟁력을 키워낼 주체적인 용기와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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