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원 독립서점 책방 ‘감’ 대표
어느 날 알고 지내던 교수님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책방에 오셨다. 차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학생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교수님은 최근 과제물을 검토하다 씁쓸한 경험을 했다며 말을 꺼냈다. 십여 명의 학생 과제물이 서로 비슷해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하셨다. 20여 명의 학생 가운데 단 1명만이 자기 생각을 담아 제출한 것 같다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생각하는 일’조차 어느 새 외주화돼 학생들의 일상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실감했다. 학습 과정을 건너뛴 채 비판적 사고와 문제 해결 능력을 약화시키는 ‘학습의 외주화’, 그리고 인간이 기억·계산·문제 해결·의사결정과 같은 인지적 부담이 따르는 정신적 작업을 스마트폰이나 검색엔진, 생성형 AI와 같은 외부 도구에 위임하거나 의존하는 ‘인지적 외주화’가 눈앞에서 펼쳐진 셈이다.
이 장면을 곱씹다 보니 또 다른 외주화를 하나 떠올리게 됐다. 바로 ‘민주주의의 외주화’다. ‘외주화’라고 하면 흔히 노동 현장에 만연한 ‘위험의 외주화’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사람들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을 타인이 대신해 주기를 바란다. 민주주의를 이런 노동과 위험의 문제로 바꿔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어렵고 번거로운 일로 여기며 누군가가 대신 잘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250년 전 민주주의가 재탄생할 때도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논란의 대상이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시끄러웠고 쉽게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운 정치 체제이자 사회제도다. E E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의 엔진은 갈등이라고 했다. 갈등은 본래 복잡하고 피곤하며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번거로운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갈등을 회피하고, 판단을 미루며, 선택을 유보한 채 누군가가 대신 결정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다.
학생들이 과제를 외주화하듯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주화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는 과정은 여론조사와 댓글에 맡기고, 판단은 소수의 전문가나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맡기며, 참여는 투표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태도 말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점점 ‘참여하는 체제’가 아니라 ‘위임하는 체제’로 변해 간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학습을 외주화한 학생들의 글이 서로 닮아있듯, 민주주의를 외주화하는 사회 역시 생각 없이 의견만 닮아 갈 수 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다양성이 점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특정 유튜브 채널에 의존하고 있다. 일부 콘텐츠는 구독자 수와 수익을 위해 자극적인 표현과 부정확한 정보를 무분별하게 확산시키기도 한다. 이를 시민이 여과 없이 받아들일 때 다양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특정 주장만 반복되면서 갈등은 증폭되고 혐오는 조장된다. 그 결과 더 큰 충돌로 이어져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대신해 주는 제도가 아니다. 서툴고 느리더라도 각자가 자기 생각을 말하고, 타인의 생각을 듣고, 때로는 불편을 감수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번거롭다고 넘겨버리고 외주화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어떤 내용으로 과제물을 제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툴더라도 자기 생각을 적어낸 그 한 명의 학생이 떠오른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이런 시민에 의해 겨우겨우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광장에서 외치던 거창한 참여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외주화의 중단’을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누군가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일, 쉽게 동의하기보다 잠시 멈추고 질문하는 힘, 그리고 힘들더라도 자신의 언어로 말해 보는 일 등이 있을 것이다. 많은 시민이 탈정치화, 정치적 무관심, 엘리트 민주주의, 인지적 외주화에서 벗어나 광장에서 생산자가 되어 만들어 낸 민주주의처럼, 일상에서도 민주주의를 외주화하지 말고 주권자로서 참여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다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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