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붐으로 메모리가 중심으로 급부상
한국 반도체 산업 전성기, 신규 투자 본격화
전력 확보 난관, 정부까지 나서 대책 마련 골몰
반도체 산업이 AI 붐으로 슈퍼사이클을 맞이하면서 전력 공급이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사진=제미나이 생성.]
한국 반도체 산업이 인류 발전을 가속화하는 핵심 기술로 떠올랐다. AI를 구동하기 위해서는 GPU와 함께 고성능 메모리가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주요 IT 기업들이 한국을 찾아 메모리를 팔아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일상이 됐다.
반도체 업계는 증가하는 수요에 맞춰 메모리 생산을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초호황을 가리키는 '슈퍼 사이클'이 최소 수년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 더 많이 공급해야 실적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어서다.
기존 팹을 얼마나 빠르게 업그레이드하고 용인 클러스터 등 신규 팹을 구축하는지가 미래 승부를 좌우하게 될 이유다. 모든 기업들이 앞다퉈 고성능 장비와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는데 바쁘다.
정부까지 나서 국가적인 전력 공급 대책을 논의하는 것도 결국은 반도체 업계에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다. 반도체 팹에서 원자재와 기술력보다 중요한 요소가 바로 안정적인 전기 에너지. 전력 산업도 반도체와 함께 단순 인프라 구축을 넘어 세계로 진출할 기회를 모색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가 주주총회 현장에서 HBM4를 소개하는 모습 [사진=삼성전자]
◆ 소모품이던 메모리, 이제는 ‘스페셜티’로
메모리 반도체는 이름처럼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역할에 따라 S램과 D램, 그리고 낸드플래시를 비롯한 저장장치로 나뉜다.
메모리는 오랫동안 소모품에 머물러 있었다. 구조가 상대적으로 간단해 부가가치가 높지 않았고, 덕분에 누가 더 저렴하고 많이 만드냐에 따라 평가가 갈렸다.
성능적인 한계도 명확했다. 연산장치에 직접 붙이는 S램은 너무 비쌌다. D램은 데이터를 전달하는 통로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낸드는 느렸다.
때문에 메모리는 컴퓨터 성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었다. D램이 오랫동안 미세 공정을 통한 효율 개선에만 초점을 맞췄던 이유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면서 메모리 위상은 변했다. GPU가 천문학적인 데이터를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도록 성장했지만, 정작 ‘메모리의 벽’ 때문에 학습 속도를 높이기가 어려웠던 것.
엔비디아가 그래서 선택한 기술이 바로 고대역폭메모리(HBM)다. D램에 구멍을 뚫어 붙이는 방식으로 데이터 전송량을 폭발적으로 개선했다.
당초 HBM은 AMD와 SK하이닉스가 함께 개발했다. 그래픽 카드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였는데, 이후 삼성전자도 뛰어들었지만 수율을 확보하기 어려워 가격이 비싸다는 단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시장에서 잊혀졌다.
SK하이닉스는 HBM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은 엔비디아에 선택을 받았다. AI 학습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에도 비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었다. 덕분에 D램 가격은 HBM 수준으로 폭등했고, 메모리 사업 영업이익률은 50%마저 훌쩍 넘어선 상황이다.
HBM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AI 칩의 ‘오른팔’을 넘어 연산 기능을 더하고 활용처에 맞추는 ‘커스텀HBM’으로 개발이 한창이다. 일각에서는 메모리 중심 시대가 열렸다며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용인반도체 국가산단’ 인근 송전선로 모습. [사진=박윤 기자]
◆ 메모리도 투자 수익 안정화, 반도체 업계가 신규 팹 전력 쏟는 이유
한국은 오랫동안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지배해왔다. 점유율이 절반을 훌쩍 넘은지 오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30~40%를 공급하고 있다.
한국이 메모리 산업을 주도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다. 삼성전자가 1983년 세계에서 3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지만, 기술 종주국인 미국과 일본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까지만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년이 지난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확고한 리더십을 확보했다.
그동안 수많은 경쟁 업체들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초기 투자 비용이 천문학적인데도 주기적으로 '치킨게임'이 불가피한 산업 특성상, D램을 처음 만든 인텔을 비롯해 일본 엘피다와 도시바, 독일 키몬다 등이 파산하거나 분리 혹은 합병됐다.
한국 반도체 업계는 어려움 속에서도 과감한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경쟁력을 공고히 지켜냈다. 삼성전자가 1983년 64K D램을 개발하고 10년 만에 일본을 따라잡았고, SK하이닉스는 SK그룹 인수 후 과감한 전략으로 체질을 완전히 개선하며 한때 삼성전자까지 넘어서기도 했다.
메모리 중심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 메모리는 이제 세계 반도체 업계 판도까지도 바꿀 조짐이다. 블룸버그를 비롯해 여러 전문가들은 내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영업이익 세계 1위와 3위를 차지할 것으로 봤다. 엔비디아가 2위, 오히려 AI 붐을 일으킨 기업을 추월하게 되는 셈이다.
한국 반도체 업계가 또다시 투자 경쟁에 나서는 이유다. 메모리 산업이 더이상 '사이클'에 좌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물량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는지가 미래 경쟁력을 결정할 전망이다.
삼성전자 경기 평택사업장 [사진=삼성전자]
◆ 반도체 경쟁력, 전력이 좌우한다
메모리 반도체는 범용 제품인 만큼 규격만 맞추면 기술력보다는 수율을 얼마나 높이는지에 따라 경쟁력을 판단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물량을 더 저렴하게 공급하느냐에 따라 공급 계약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HBM도 크게 다르지 않다. 커스텀 HBM을 시작하게 되는 HBM4E가 D램을 16단 이상 쌓아올리는 제품. 초기에는 구멍을 뚫고 붙이는 패키징 기술이 차이를 보였지만, 기술이 상향 평준화하면서 결국은 원재료인 D램 성능과 물량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는지에 따라 경쟁력이 갈릴 전망이다.
반도체 업계가 많은 전력을 애타게 갈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존에 사용하던 팹을 메모리로 전환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팹과 용인 클러스터 등 신규 캠퍼스까지 구축을 준비 중인 상황. 전력이 부족해 공장을 돌릴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 팹은 안정적인 지반과 전력 공급을 전제로 구축할 수 있다. 반도체 장비가 나노대로 미세해지면서 공정 난이도도 크게 높아졌다. 아주 작은 흔들림이나 잠깐의 정전에도 웨이퍼를 전면 폐기해야한다.
특히나 최신 장비는 더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한다. 미세 공정 핵심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기존 DUV와 비교해 10배가 많은 1MW급, 차세대 하이NA EUV는 2MW급으로 2배로 늘어난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감도.[사진=용인시]
◆ 국가적인 과제, 반도체에 전기를 공급하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국내에서 사용하는 전력량은 연간 40TWh를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소비량(약 540TWh) 중 무려 7% 수준이다.
용인 클러스터는 기존 팹보다 3배를 더 사용할 전망이다. 구축 계획에서는 전력 설비를 15GW급으로 보고 있다. 연간 전력량으로 환산하면 최대 130TWh. 현재 전국에서 사용하는 연간 소비량에서 30%를 집어삼킨다는 얘기다.
심지어는 친환경 에너지 확보도 시급하다. 전세계가 ESG 경영을 이유로 반도체에 탄소배출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구글을 비롯해 빅테크 업체들이 메모리에도 압박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은 신재생에너지 발전 경쟁력이 낮은 편이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남쪽에 몰려있어 수도권으로 전력을 끌어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가 나서서 대책 마련을 시작한 이유다. 한반도 전역을 송전망으로 연결하는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을 약속하고, 신재생에너지는 물론 SMR을 비롯한 다양한 대안을 논의 중이다.
다만 대규모 송전탑 설치와 지역간 균형 발전 등을 이유로 좀처럼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반도체 팹을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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